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책뿐만 아니라 작가 본인에 관한 다양한 기사가 쏟아졌다. 채식에 가까운 식사를 하고 술도 못하고 카페인에 민감하고 여행보다 산책을 즐긴다는 작가. 그런 식물성의 작가가 우리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에 벌어진 끔찍한 두 사건(제주4·3사건과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몇 년간 취재하고 공부하며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를 썼다. 한강 작가 같은 식물성의 사람이 그런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을 마주할 용기를 가졌다는 게 때론 믿기지 않는다.
양념치킨, 삼겹살, 곱창, 족발, 닭백숙, 감자탕 등은 내가 먹지 않는 음식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끓여준 소고깃국 앞에서 나는 눈물을 떨구었다. 소고기 국물에 큰 눈을 껌뻑이는 소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많은 음식들이 내겐 음식이 될 수 없었다. 간혹 편식하는 내 건강을 걱정하는 지인들이 있다. 모든 존재는 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다. 나 또한 그렇다. 단백질 섭취를 위해 매일 우유와 달걀, 호두를 먹고, 두부나 치즈를 자주 먹는다. 거기에 바나나와 계절과일 한두 가지만 더하면 영양 부족 걱정은 없다. 나는 사람이 사는 데 너무 많은 생명이 동원되는 게 두렵다. 그래서 공포영화도, 살육이 난무하는 전쟁영화도 보지 않는다.
1984년 부산에서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과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학교로 돌아오던 길에 다른 단과대 건물에 사진이 전시됐다고 해 따라갔다가 광주의 참상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을 보게 됐다. 그때의 공포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공포에 질린 나는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가는 친구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감기든 체증이든 걸리기만 하면 일주일씩 앓아누울 만큼 몸도 마음도 허약하던 시절이었다. 사진이 전시됐던 건물은 그 뒤에도 한참 동안 드나들지 못했다. 그렇게 도망 다니듯 시대의 현실을 외면하고 졸업했다. 광주의 일은 그렇게 내 의식의 수면 아래 깊숙이 묻어두었다.
한창 직장생활을 하던 20대 중반, 여동생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가보고 싶었던 곳을 다니다 저녁 무렵 호텔에 들어가 쉬면서 TV를 켰다. 마침 고두심 배우가 나왔다. 그 무렵 ‘사랑의 굴레’라는 주말극에서 “잘났어, 정말”이란 유행어로 해를 넘기고도 인기가 절정일 때였다. 그런데 지금껏 TV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낯선 표정과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압도됐다. 바로 ‘4·3사건’ 관련 행사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여행지이자 휴양지로만 알았던 제주도는 그날 이후 다르게 인식됐다. 이때도 나는 회피로 일관했다.
지난 10월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면서 더는 숨을 곳이 없었다. 내가 나고 자란 이 땅에서 일어난 일, 76년 전과 44년 전의 비극은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당사자가 눈 감고 귀 닫은 비극은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며 반복된다는 걸 나는 정말 몰랐을까. 이제 더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주문했다.
지인의 권유대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먼저 읽기로 했다. 식욕은 더 떨어졌고, 깊이 잠들 수도 없었다. 한강 작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채식을 주로 하고 카페인에 예민한 작가가 900명의 증언 구술집을 모두 읽어내고 책을 쓰기까지 어떤 시간을 견뎠을지 내 몸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소년이 온다’를 읽는 동안은 밥을 먹는 일이 더없이 고역스러웠다. 책을 다 읽고 얼마간은 내용을 알 수 없는 악몽을 꾸거나 조각난 잠을 자곤 했다. 5·18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고도 40년이나 외면해 왔으나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는, 마주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대학 새내기 때나 40년을 더 살아낸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단단한 어른은 되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을 읽어낸 덕에 ‘인선의 엄마’와 ‘동호’라는 소년을 가슴에 품게 됐다. 국가 권력에 목숨을 잃은 가족의 뼈라도 찾으려 한 맺힌 일생을 버티고 버틴 여인과, 내 나라 군인이 쏜 총에 쓰러진 친구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전남도청에 남았다가 희생된 소년 ‘동호’.
나와 내 가족들처럼 특별히 잘난 것도,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들. 그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악몽을 이 땅에서 살아갈 다음 세대에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끔찍했던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눈감지 않고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한강 작가가 눈물과 고통 속에 써 내려갔을 글 속에 아직도 피눈물이 마르지 않은 유가족과 자손들, 억울한 영혼들이 어려 있다. 40년 만에 용기를 내 오래 외면해 온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고개 숙여 용서를 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세상에 내보내면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다. 끔찍한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중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그날을 증언하고, 누군가는 기록하고, 또 누군가는 그 자료를 잘 지켜냈다. 그 힘은 희생당한 가족에 대한 유족들의 못다 한 사랑에서 나왔을 것이다. 유족들의 지극한 사랑이 한강 작가에게 가닿았고, 그 사랑으로 지켜낸 자료들로 써 내려간 이야기가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