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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무로 담근 깍두기 한 그릇

깍두기 나라에서 온 마음

by 봄이

갑자기 깍두기가 너무 먹고 싶었다.
이곳 슈퍼엔 배추는 종종 보이지만, 무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런던이나 카디프의 한인 슈퍼에 가지 않고서는 구하기 어려운 일이다.


가끔 중국인 가게나 중앙아시아 상점을 지나치면, 단무지용으로 쓰는 길쭉한 무 몇 개가 보이곤 한다. 어떤 사람은 그걸로 무생채도 담그고 깍두기도 만든다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그조차 귀하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깍두기는 애써 잊고 살았다.


그런데 지난번 백김치를 담그며 색을 내려고 샀던 빨간 무를 한입 베어 물었을 때였다. 입안 가득 퍼지는 아삭함, 시간이 지나도 물러지지 않는 단단한 식감.
‘그래, 바로 이거야.’
그 순간, 뜻밖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장을 보러 나가 빨간 무 네 봉지를 사 들고 돌아왔다.
밤톨만 한 무를 반으로 잘라 깍두기를 담갔다.
사실 반신반의하며 시작했지만, 결과는 뜻밖의 대성공이었다.


그 익숙한 향, 고춧가루에 버무려진 무의 빛깔, 그리고 첫 젓가락에 전해지는 그리운 맛. 한입 먹자마자 마음 깊은 곳이 따뜻해졌다.

사람이 어디서 둥지를 틀든,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음식, 결국 다 해낼 수 있는 법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처럼, 무가 없으면 빨간 무로 담그면 된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있는 것으로 길을 찾아내는 법을 안다.

멀리 떨어진 이 낯선 땅에서도 한국인은 그렇게 살아간다.
손에 잡히는 재료로 새로운 맛을 만들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단단히 빚어낸다.


조금 불편해도, 조금 다르더라도, 결국 자기 방식대로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게 아마 우리 안에 흐르는 ‘생활의 힘’, 그리고 ‘버텨내는 마음’일 것이다.


냉장고 속에서 익어가는 빨간 깍두기를 바라본다.

이 낯선 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한국인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그 아삭한 소리 속엔, 멀리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우리의 맛과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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