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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양 Aug 03. 2024

유모와 가사도우미가 있지만, 사모님은 아닙니다.

프롤로그








양곤은 현재 우기다. 밤새 시도 때도 없이 폭우가 쏟아진다.




아침까지 비가 내리는 날이면, 종종 N의 출근이 늦어진다. 편도로 1시간 30분 거리를 두세 번 버스를 갈아타고 오는 그녀이기에 궂은 날의 지각은 눈감아 주는 편이다.



그녀가 도착할 때쯤 남편은 이미 회사에 가고, 나 혼자 7개월 된 럭키와 놀아주고 있다.   



출근 후 N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물을 끓여서 달콤한 인스턴트 차를 만든 뒤 거리에서 사온 간단한 음식과 함께 여유롭게 아침을 먹는다. 새벽같이 일어나는 아기와 이미 몇 시간째 씨름하고 있던 나는 가끔 느긋한 그녀를 보며 속이 탄다.



하지만 8시까지 출근을 하기 위해 집에서 새벽 5시 40분에 나온다는 말을 듣고 난 후  너그러워지려고 항상 노력 중이다.



아침 식사 후 그녀는 밤새 널려 있던 빨래를 정리한다. 9kg에 육박하는 아기를 안아서 달래거나, 한창 천방지축으로 기기 시작한 아기를 뒤쫓아 다니는 것보다 빨래 개는 일이 훨씬 더 편하고 쉽지만 나는 그녀에게 럭키를 넘겨주지 못한다.



내니(유모)와 헬퍼(가사도우미) 경험이 오래된 N은 빨래 개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녀가 개어놓은 옷은 마치 옷가게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티셔츠 같다. 뭘 해도 삐뚤빼뚤 엉망으로 만드는 똥손인 나보다 그녀의 손에 맡기는 쪽이 옷에 대한 예의였다.



마침내 원래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N은 럭키를 내게서 받아 안고 본격적인 내니 일을 시작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우유 잔뜩 먹고 한참 놀았던 럭키는 N이 안아서 거실을 몇 번 오고 가며 흔들어주면 금방 잠이 든다.




그제야 나는 침대로 기어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다.



하지만 럭키 이유식 만들기, 내 점심으로 먹을 밥 안치기, 어제 읽다 만 책 마저 읽기, 마트 앱에 들어가 기저귀를 검색하거나 식재료 주문하기 등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잠이 오지 않는다.



결국 럭키 이유식으로 쓸 소고기를 삶기 위해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거실로 나오자 N은 잠든 럭키를 안고 소파에 앉아 졸고 있다.



두 사람이 깰까봐 발소리마저 죽인 채 주방으로 가서 이유식을 만들다 보면 문득 돈주고 고용한 사람이 N인지 나인지 헷갈리곤 한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면 파트타임으로 고용한 헬퍼 딴딴이 출근한다.



물론 본명은 아니다. 그녀가 출근한 첫 날 내가 딴딴의 진짜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자 통역을 해주던 N이 딴딴이라고 별칭을 지어주었다.


딴딴은 주방 청소부터 시작한다.



N은 한숨 자고 일어난 럭키와 놀아주거나 내가 데워다 준 이유식을 먹이고, 그도 아니면 럭키를 안은 채 딴딴이 하는 일을 지켜보며 훈수를 둔다.



지금 딴딴이 하는 집안일은 불과 얼마 전까지는 N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 N을 고용할 때 헬퍼 겸 내니로 채용했었다. 방 두 개짜리 크지 않은 콘도에 단촐한 세 식구였기에 굳이 구분해서 사람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고령의 초보 엄마는 오전 내내 N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의 육아가 너무 고달팠다.



오후가 되어 럭키를 N에게 넘겨주고 나서도 내 손이 가야하는 나머지 집안일, 아기목욕수발, 저녁 식사 준비(N을 고용할 때 요리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N이 퇴근한 후에는 육아와 설거지, 잠투정 심한 아기 재우기 등 하루 하루를 미션을 수행하는 심정으로 저질체력을 갈아넣었다.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육아에 뛰어들 정도로 가정적인 사람이지만 이미 엄마와 애착관계가 형성된 아기는 아빠가 재우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고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울어댔다.


..



미얀마는 인건비가 굉장히 저렴한 편이고, 사실 사람을 한 명 더 구하는 건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달을 버텨왔다.



가족이라고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아빠와 사지 멀쩡한 엄마와 7개월 짜리 아기 뿐이었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 해도 일하는 사람을 무려 두 명이나 채용한다는 건, 한국에서는 누군가의 고용인인 적 없었던 평범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럭키는 이앓이 때문에 밤새 자다 깨다 하면서도 새벽 5시 30분에 칼같이 기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밤새 아기를 달래다 잠들기를 반복하며 쪽잠을 잤다.



N이 집안일을 끝내고, 점심을 먹고, 이를 닦은 후 럭키를 받아 안을 때까지 6시간 이상을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육아와 씨름하던 눈물겨운 나날이 이어지다,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물론 N이 럭키를 봐줄 때 내 한 몸 먹고 씻고, 우리 부부의 끼니 정도는 준비할 수 있었다. 쫓기듯 밥먹고 치우고 요리하고 설거지를 끝내면 N이 퇴근한 후의 밤육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짬짬이 조각난 시간에는 마트 앱으로 식재료와 생필품을 주문했다. 양곤에서 내가 원하는 품질의 기저귀나 분유 등 아기에게 필수적인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건이 입고 되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아기의 개월 수가 차면서 점점 범위가 넓어지는 육아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검색하기, 요리와 양치 때도 생수를 써야 하는 환경상 물이 떨어지기 전에 주문하기 등 소소하지만 꼭 필요한 가사 기획 노동들은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하나가 이어졌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고, 소설을 쓰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공백이 길수록 다시 시작하기가 힘들다는 걸 경험상 알고 있었다.



작년 임신 기간에 쓰고 출간했던 소설의 외전을 한 줄씩, 다섯 줄씩 감질나게 써나가고 있었지만, 40대에 엄마가 된 나의 체력은 한글 파일 앞에만 앉으면 온 몸이 뻐근하게 아프거나, 노곤하게 피곤했다.



마침내 나는 남편에게 파트타임 헬퍼를 고용하겠다고 통보했다. 의논이나 타협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는 더 충분한 시간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 이후 우여곡절 사연 긴 구인 끝에 현재 딴딴이 하루 4시간씩 집안일을 해주러 오게 된 것이다.   



..




“와, 일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어? 너 사모님 같다, 야.”



카톡으로 한국에 있는 절친들과 이야기를 하다 사모님 소리를 들었다.



순간 나는 럭키가 토한 흔적이 남아 있는 목 늘어난 티셔츠, 펑퍼짐한 반바지 차림의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세수 안 한 얼굴에 짧은 머리를 끈으로 댕강 묶고 있다. 사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마땅히 풍겨야 할 기품은 고사하고 눈에 눈곱이나 안 끼었으면 다행이다.



혹시 친구는 일하는 사람을 두 명이나 고용했다는 말을 자랑처럼 받아들인 걸까.



실상은 그다지 우아한 사모님 생활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해외에서, 그것도 인프라가 아주 열악한 나라에서 아기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전투적인지 항변 하려다 그만두었다.



사모님은 아니지만 유모와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고, 그럼에도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은, 한국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육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가족과 친구 한 명 없는 타국에서 아기를 키우며 고달프기도 하지만 덕분에 유모와 가사도우미라는, 한국에서는 쉽게 엄두를 못 낼 혜택을 누린다.



지난 나의 모든 타향살이들이 그랬다.


여행같은 삶을 누리지만 안정감을 가질 수 없었고,


새로운 경험들을 쌓을 수 있었지만 그 경험만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잃었다.


어떤 것을 선택하면 다른 어떤 것을 잃는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관념적이다.



평소에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지만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거나, 심지어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해외 생활은 이 잔인할 정도로 공평한 인생의 법칙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래.

좋은 것만 생각하자.



엉덩이 발진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기저귀를 구하려고 매일 마트앱을 들락거려야 하지만,



한국같이 시판 이유식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요리무식자 주제에 매일 이유식을 만드느라 진땀 흘리지만,



육아 고충을 함께 나눌 가족과 친구도 없지만.



대신 내게는 유모와 가사도우미가 있다!


베란다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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