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양 Aug 09. 2024

캐나다에서 마주친 나의 20대

밴쿠버





20대 대부분의 시간을 소설을 쓰면서 보냈다.



지금은 전자책이나 플랫폼 유료연재가 일반적이지만 그 당시 로맨스 소설의 출판 흐름은 사이트 무료 연재, 출판사 투고나 컨택, 종이책 출간이 대부분이었다.



전자책 시장은 태동기였고 종이책으로 출판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게 전자책 출간이었다. (그 다음 몇 년간은 종이책으로 선출간 후 약간의 텀을 두고 전자책 출간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위 몇 프로의 베스트셀러 작가를 제외하면 밥 먹고 살기 빠듯한 건 지금이나 그때나  비슷하다.



약 20년 전 출판사와 첫 계약을 했을 때 나의 인세 계약 조건은 3000부에 6%였다. 책값은 9,000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책 한 권을 냈을 때 받는 돈이 고작 162만원, 그것도 세전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처음 쓴 허접한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준다는 게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계약금으로 30만 원을 받았고 나머지는 출간 후 정산해주기로 했는데 정산을 차일피일 미루던 출판사가 끝내 망해버렸음)



이후로 책 한 권씩 낼 때마다 아주 조금씩 계약 조건이 나아지긴 했지만, 주로 4000부에 8%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전 금액으로 288만원)



다행히 씀씀이가 큰 편이 아니었고, 친구들과 같이 살아서 생활비가 많이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나눠서 낸 집 전세금은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월세 걱정도 없었다.



잠깐 회사를 다녀보기도 하고(나름 정직원이었으나 소설을 쓰려고 10개월 만에 사표 씀), 카페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모자란 생활비나 여행 경비를 충당했다.



조금 부족하게 살아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적성에도 안맞는 직장을 꾸역꾸역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묘한 우월감마저 느꼈었다.   



하지만 나이 앞자리 수가 3이 되면서 상황이, 그리고 내 마음이 달라졌다.



하나 둘씩 사회에 자리를 잡고 안정을 찾아가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불안정한 나의 위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돈도 유명세도 없는, 그저 근근생활을 이어가는 보잘 것 없는 장르 소설 작가로 30대를 보낼 생각을 하니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나마 소설을 쓰면 책이라도 낼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커녕 그 행운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아무도 내 글을 거들떠 보지 않으면 나는 미련을 버리고 이 길을 훌훌 털고 다른 일을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만족감은 어느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깜깜한 미래만 그려졌고 우울했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 이대로 30대를 또 꿈 쫓아 허비해버린다면 비참한 말로만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그때 나의 커리어라곤 10개월 가량의 정직원 회사 생활, 몇 개월 짜리들의 아르바이트들, 그리고 10종이 넘는 소설 출간 경력뿐이었다. 이력서에 적을 만한 괜찮은 학벌도, 그럴 듯한 스킬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빠른 시일 내 다시 학교에 들어가거나 다른 커리어를 쌓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스킬을 만드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내가 선택한 건 ‘영어’였고, 결정을 내리고 후다닥 준비해서 서른한 살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어학연수를 떠났다.



  

(연수 경비는 부모님께 ‘결혼자금’을 당겨 달라고 해서 받았다. 그래서 실제로 결혼할 때 부모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기초 영문법조차 몰랐던 나는 필리핀을 거쳐 캐나다로 갔다. 10년 가까이 소설만 쓰던 사람이 다시 공부를 하려니 쉽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그것도 부모님께 결혼자금을 미리 받아서 온 연수 였기에 항상 각오를 다잡았다.



소설쓰기는 커녕 한국어로 된 책도 읽지 않았다. 영어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어학원을 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문 튜터와 ubc학생에게서 튜터링(과외)을 받았다. 어학원 수업과 튜터링이 끝나면 매일 과제를 하고 예습을 하며 치열하게 부했다.



내가 주로 공부하는 곳은 카페나 도서관이었는데, 그 중에서 밴쿠버 도서관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콜로세움 처럼 생긴 도서관의 1층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가 있었다. 한국책이 읽고 싶어질까봐 일부러 그 근처를 피해 다녔다.


주로 공부하러 간 카페는 스타벅스, 팀 홀튼, 블렌츠



책 따위 읽지 않겠다. 책을 읽으면 소설이 쓰고 싶어질 테니까. 소설가는 버린 인생이다. 돌아보지 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만 앞으로 번듯하게 살아갈 수 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영어공부 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국책들이 꽂힌 책장 앞에 섰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다음 세션을 위한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고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인지도 모르고,  한글로 된 이야기가 읽고 싶은 욕구를 결국 못 참았았던 것일 수도 있다.



종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너무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을 생각을 하니 설렜다.



(하이틴 로맨스 원서를 조금씩 읽기는 했지만, 영어 공부를 위해서였다. 읽는 즐거움을 조금 맛볼 수는 있었지만 모르는 단어를 짐작하거나 뜻을 찾느라 바빠 온전한 독서라 말하긴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책꽂이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됐다. 잘못 본걸까. 눈을 여러 번 깜빡여 보았다. 하지만 분명 그곳에 내 필명이 적힌 책이 꽂여 있었다. 그것도 한 권도 아닌 두 권이나.




로맨스 소설을 처음 출간했던 시절의 초기 소설들인 ‘돌이킬 수 없는 사랑’(동아, 2005)과 ‘이별한 사람들만 아는 진실’(청어람, 2006)이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내 20대가 인생에서 쓸모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쓰고 또 썼지만 결국 나는 패배자였고 도망자였다. 하루라도 빨리 먹고 살 다른 길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쓸모 없고 하잘 것 없다 여겼던 결과물이 오랜 시간을 돌아 그리고 아주 먼 거리를 뛰어 넘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책들이 대단히 성공해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은 그 당시 굉장히 복잡한 인세 정산 계약을 했었는데, 받은 인세를 다 합치면 100만원이 채 됐으려나. (이때의 경험 때문에 보장부수를 해주는 출판사하고만 계약했다)



아마도 한국에서 누군가 우연찮게 가져간 책을 도서관에 기증한 게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아무렴 어때.



나는 그 순간 내 20대의 시간들을, 낭비라 여겼던 그 노력들이 비로소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잠시 책을 꺼내 쓰다듬어 보고, 다시 꽂아 넣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잡았다.



비록 지금은 공부를 해야할 때라 잠시 놓고 있지만, 때가 되면 다시 글을 써야겠다.



꿈을 포기한 게 아니라. 더 오래 쓰기 위해서 인생을 공고히 다져가는 과정일 뿐이다. 언젠가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쓰고, 책으로 만들어서 다시 세상에 내놓아야지.



고마워, 내 20대.

지금의 나를 원해줘서. 

그리고 위로해줘서.










이전 03화 해외에서 마감하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