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반 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2주도 채 남지 않았던 2021년 9월의 어느 오후였다.
13구에 있는 호텔 방 식탁에 앉아서 ‘짝사랑중입니다’ (밀리의 서재, 2021)의 2교(2차 수정안)을 받아 작업중이었다. 적은 분량은 아니었지만 이틀 남은 마감날까지는 쉬엄쉬엄 일하면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침실 하나와 거실이 있던 호텔방(서비스 아파트먼트)
호텔은 유동인구가 많은 플라스 디탈리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역 앞 카페, 야외 테라스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어수선한 소음이 열린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금요일 오후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3개의 노선이 지나던 플라스 디탈리역 앞 시타딘 호텔
남편이 퇴근하면서 저녁을 포장해왔다. 잠시 노트북을 제쳐두고 남편과 오붓한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그날 남편은 같이 일하는 분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고 한다.
“이제 프랑스에서의 주말이 딱 두 번밖에 안 남았는데 그냥 허투루 보내는 건 너무 아깝지 않냐고, 가까운 나라 어디든 가라고 하시더라고.”
“추천해주신 곳 있어?”
“영국은 아직 입국 후 자가격리가 안 풀렸고, 이탈리아나 스페인도 좋대. 어떤 분은 바르셀로나가 인생 여행지였대.”
“아, 마감만 아니면 우리도 어디든 떠났을 텐데.”
“일요일까지지? 많이 남았어?”
“마감날까지 하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한국으로의 예정보다 빠른 귀국이 갑작스럽게 정해진 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파리의 생활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즐기고, 근처 다른 유럽 국가 여행도 많이 다녔을 텐데.
나도 나지만 남편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자기 혼자서라도 어디 다녀와.”
“에이, 어떻게 그래.”
“나 진짜 괜찮아.”
“혼자서 무슨 재미로….”
그러면서도 순간 혹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나 없이 혼자 떠날 생각까지 하다니(보통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원플러스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붙어 다닌다), 정말 아쉽긴 아쉬운 모양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남은 분량을 떠올렸다. 밤새 작업한다면 내일 오전까지는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유럽의 주말을 흘려보내기 싫다는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가자, 바르셀로나.”
“뭐?”
“나 지금 바로 다시 작업 시작할게. 자기는 일단 저녁 먹은 거 치우고, 비행기 티켓이랑 호텔 예약해.”
잠시 어리버리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남편이 이내 신나게 노트북을 펴들었다.
“당장 내일 아침에 떠나는 비행기표 남은 게 있을까? 아 일단 월요일 연차부터 빨리 써야겠다.”
이어폰을 귀에 꽂아 한껏 들뜬 남편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때였다.
어느새 파리의 늦은 해가 떨어지고 희미하게 켜둔 오렌지색 스탠드 불빛이 호텔방 안을 밝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커피를 한 잔 더 마실 겸, 여행 준비에 대해 물을 겸 잠시 고개를 들었다. 남편도 식탁 맞은편에서 노트북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행기표 끊었어? 내일 몇 시 비행기야?”
“아침 7시.”
“???!”
“오를리 공항까지 버스타고 가려면 5시 전에는 호텔에서 나가야 해.”
“???????!!!”
“호텔 괜찮은 곳 찾았는데 볼래?”
호텔이 어디인지는 쥐뿔도 중요하지 않다.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남편은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하고, 스페인 입국시 검역에 필요한 QR코드를 다운받고, 여행 가방을 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수정 작업에 매달렸다.
남편이 먼저 잠자리에 들고, 시간은 자정을 지나 이내 새벽으로 넘어갔다. 어깨는 뻐근하고 팔목은 아프고 눈은 뻑뻑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벽 2시 즈음,
원고의 마지막장을 끝냈다.
장장 8시간에 가까운 집중.
스스로 대견해 어쩔 줄 몰랐다.
하, 고등학교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마감일에는 스페인에 있을 예정이니, 수정을 끝낸 원고를 바로 편집자에게 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의 옷가지를 넣고 나머지 한쪽을 비워둔 채 펼쳐놓은 여행가방 안에 대충 옷 몇 벌과 화장품 샘플을 집어넣었다.
곧장 침대로 갔다.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남편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원고 끝내고 자는 거지?”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재빨리 샤워를 끝내고 호텔을 나섰다. 아직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이었다. 호텔 바로 근처에 오를리 공항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아주 이른 시간인데도 오를리 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키오스크로 티켓을 발권하고 검색대를 지나는데 직원이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내가 대충 화장품 샘플들을 넣었던 지퍼백을 꺼내 공항 검색대에 비치된 지퍼백으로 일일이 옮겨 담는다. 그 외에도 짐 검사가 아주 꼼꼼했다.
“오를리 공항이 원래 이렇게 빡빡한가, 아니면 오늘이 9월 11일이라 그런가.”
“왜? 아, 911테러.”
유럽 저가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좌석 앞 주머니에 이전 손님이 쓰고 버린 마스크가 처박혀 있다. 아직 코로나가 기승이던 때이지만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이 찜찜함을 이겨버렸다.
꾸벅꾸벅 졸다보니 어느새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카탈루냐 광장 근처의 호텔 방에 가방을 던져놓고 나왔다. 푸르른 하늘, 상쾌한 공기, 선이 굵고 아름다운 건물들. 파리와 비슷한 듯 다르다.
그날 아침의 바르셀로나
광장 근처 사람들이 붐비는 카페에 가서 커피와 빵을 주문했다.
감격스럽다.
불과 어젯밤만 해도 파리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지금은 바르셀로나에서 아침을 먹다니.
그런데 왜 이렇게 눈이 감기지. 안 돼. 이제 막 바르셀로나 여행이 시작됐는데, 정신 차리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진한 에스프레소를 원샷하고, 어디부터 갈지 남편과 함께 검색을 해본다.
우리 부부는 여행가기 전에 준비를 많이 하거나, 정보를 검색해보는 편은 아니었다. 주로 쓰는 방법은 일단 도착해서 네이버에 도시 이름을 쳐서 가볼만 한 곳 순위를 확인하고 높은 쪽부터 시도해본다. 너무 멀면 차순위로 결정한다. (물론 아주 유명해서 이미 알고 있거나 가보고 싶어서 기억하고 있던 장소가 우선순위다) 식당도 구글에서 주변 맛집을 고르고 평점을 확인한 뒤 가면 최악은 피할 수 있다.
네이버가 알려주는 바르셀로나의 관광 1번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표를 예매했다. 예전 같으면 오래 전부터 예약을 해야한다고 하는데, 코로나가 휩쓸고 간지 얼마 안 된(여전히 휩쓸고 있는) 유럽은 아직 이전의 관광객 숫자를 회복하지 못했다.
여전히 건설 중인 성당은 웅장하고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감탄을 하며 성당을 둘러보면서도 잠깐씩 정신이 혼미해진다.
안 돼, 내 평생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데 이 아름다움을 눈에 담아야지! 정신 차리자.
성당 밖으로 나오자 뜨거운 햇빛이 쏟아졌다. 눈을 찡그리는 찰나, 또 다시 수마가 밀려온다.
안 돼, 잡귀야 물러가라!
성당을 나와 거리를 걷는데 점점 발걸음을 느려지고 말수도 적어진다. 졸려서 견딜 수가 없다.
아, 안 돼. 안 돼, 안….
하품과 함께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결국 백기.
거리에서 발견한 타코벨에서 타코를 포장해 호텔방에서 허겁지겁 먹어치운 뒤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고작 2박 3일의 짧은 여행. 스페인의 토요일 오후, 이 황금 같은 시간에 낮잠이라니. 억울하면서도 온 몸을 감싸는 침구가 왜 이렇게 부드럽고 푹신한지!
스페인의 눈부시고 뜨거운 햇살이, 한 줌도 들지 않는 창문 없는 호텔 방 안에서 기절하듯 잠에 들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마감을 끝냈다. 이 달콤한 성취감을 바르셀로나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앞으로도 이런 행운 같은 삶이 이어지길….
..
마감 마지막 날, ‘고백의 순간’ (북큐브, 2023) 외전 교정교를 최종 확인하고 편집자에게 메일로 보냈다.
그때의 바람처럼 여전히 나는 해외에서 마감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록 그때처럼 새로운 도시에 대한 설렘이나 열정을 즐기는 대신, 밀린 아기 빨래 때문에 세탁기를 두 번 돌리고(일요일이라 N도 딴딴도 출근하지 않는다) 뚝 떨어진 이유식을 한꺼번에 서너 가지 만드느라 마감 후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는 못했지만.
뭐.
요리 똥손인 엄마의 이유식을 너무 잘 먹어주는 우리 아기 럭키가 있으니 이것 또한 무한한 행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