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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양 Aug 05. 2024

해외에서 마감하는 삶

쿠알라룸푸르






편집팀으로부터 교정고가 도착했다. 작년에 출간한 ‘고백의 순간’ (북큐브, 2023)의 외전 원고였다.



33페이지, 27000자도 안 되는 짧은 원고인데다 맞춤법, 띄어쓰기, 비문을 마지막으로 체크하는 최종 교정고라 확인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예상을 하며 스크롤를 빠르게 내려 대충 훑어보았다.



역시, 이 정도 분량이면 집중해서 한 시간 정도만 보면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바로 시작할까 하다가 당장 더 시급한 일 -식욕이 왕성한 7개월 아기의 이유식 만들기-이 생각나서 일단 원고를 보는 건 마감 전날로 미루었다.



마음이 조급하거나 걱정되진 않는다. 피드백 온 원고를 눈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작업을 하는데 대략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예측할 수 있다.



소설 한 편만으로도 초고 마감, 수정 마감, 교정 마감 등 많게는 서너 번에서 적게는 한두 번의 마감이 있다. 그동안 20이 넘는 소설을 출간했으니 내가 겪어 온 마감도 최소한 40번이 넘는다는 뜻이다.  



비록 지금은 이유식으로 쓸 당근 손질에 그 순서가 밀리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원고 마감은 늘 내 인생에서 최우선 순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친구와의 약속도, 여행도, 데이트도 모두 마감일에 맞춰 조절했었다.



나의 게으름이나 부족함으로 인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출간 일정에 피해를 주거나 출판사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저히 끝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부쳤던 경험들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대부분 해외에서의 마감이었다.



..


2019년 늦여름, 남편의 장기 출장이 출국 3주 전에 갑작스레 결정됐다.



그 당시 나는 ‘피크 (북큐브, 2019)의 초고 마감을 앞두고 있었다.



꽤 긴 기간 동안 타국에서 지낼 예정이었기에 한국에서 정리할 일도 많았고, 그곳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남편은 인수인계로, 나는 원고 마감으로 바빠 출국 준비라고는 항공권 예약 밖에 하지 못했다. (집을 구하기 전까지 일주일간 머물 호텔 예약은 회사에서 해주었다) 그나마 그 3주 중에 명절이 끼어 있어서 떠나기 전에 가족들 얼굴은 보고 출발할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당장 필요한 옷가지 정도만 채운 여행 가방을 가지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내내 비가 내렸다. 정신없이 지내다 비행기를 탔더니 덥고 습한 날씨와 공기 속에 희미하게 섞인 향신료 냄새를 맡고서야 앞으로 이곳이 내가 한동안 살아야 할 도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호텔에 도착해 가방을 풀기도 전에 남편은 저녁 약속을 위해 다시 외출을 해야 했다.



남편은 첫날 저녁부터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하다 말했지만, 마감이 며칠 남지 않은 나는 오히려 남편의 외출이 반가웠다.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 했기에 지갑 하나 덜렁 챙겨 들고 호텔을 나섰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거리 곳곳에 고인 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화려한 조명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거리에 즐비한 술집과 식당마다 사람들로 붐볐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곳은 쿠알라룸푸르의 가장 힙한 장소 중 하나인 창 캇으로 말레이시아 힙스터들과 외국인, 여행자들이 즐겨찾는 유흥가였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노곤한 여독, 마음 같아서는 나도 저들과 나란히 바에 앉아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마시고 호텔로 돌아가 안락한 호텔 침구 속에서 뒹굴며 유튜브 영상이나 보다가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써야 할 원고 분량은 한참 남았고, 마감 날짜는 촉박했다. 결국 흥겹게 밤을 즐기는 사람들을 지나쳐 내가 들어간 곳은 세븐 일레븐이었다.



컵라면 하나와 인스턴트 그라탕 하나를 사서 호텔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남편이 출근한 후 호텔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때도 노트북을 가져갔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와 이어서 글을 썼다. 새로운 도시를 보고 느끼며 실감할 여유도 없이 그저 펑크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호텔 안에서만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을 더 달라는 말을 편집자에게 할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했던 낮과 밤을 이겨 내고 완성된 초고를 메일로 보냈다.



그날 오후, 세븐일레븐에서 라면을 사들고 온 첫날 밤 이후 처음으로 호텔을 벗어났다.


쿠알라룸푸르의 하늘은 곧장 비가 쏟아질 것처럼 우중충했고, 도시 매연으로 공기는 텁텁했지만 해방감으로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 식당에 들어가 직원에게 말레이시아의 대표 음식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나시 레막을 먹었다. 코코넛 밀크향이 섞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숟가락을 놓고 싶었지만 추천해준 직원이 기대에 찬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기에 웃으며 힘겹게 접시를 비웠다.



밥을 먹고 구글맵을 보면서 남편의 사무실 근처로 향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일단 구글 평점이 좋은 카페로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남편을 기다리고, 남편이 퇴근하면 맛집을 찾아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다.



내일은 마사지를 받고, 잘란얄로 야시장에 가봐야지. 모레에는 페트로나스 트윈 빌딩과 KLCC를 구경하고… 나시 레막을 먹으면서 검색해 본 쿠알라룸푸르의 볼거리들을 떠올리며 여행온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그때 메일이 도착했다. 원고를 확인한 담당 편집자의 답메일이었다. 다음 날 리뷰를 보내겠다는 문구에 콧노래가 멈췄다.  



출간 일정이 촉박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며칠은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초고 마감하자마자 수정 마감의 시작이구나, 하 하 하.



허탈감 섞인 실소도 잠시뿐, 내 걸음은 다시 흥겹게 이어졌다.



잠이 부족해 잠시 투정을 부렸지만 사실 나는 마감이라는 압박을 은근히 좋아한다. 일을 끝냈을 때의 성취감을 즐기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오랫동안 전업 작가로 살아오며 정해진 기한 안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건 내가 프리랜서로서 잘하고 있다(백수가 아니라는)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게 마감과 마감 사이의 시간은, 입사할 곳을 정해 놓고 퇴사한 마음 편한 백수가 출근날까지 누리는 자유와 비슷하달까.



메일을 확인한 후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커피를 마시고, 남편을 만나 저녁을 먹고, 다음날 시작될 또 다른 마감을 위해 호텔로 돌아가 일찍 잠에 들었을 것이다.



빡빡한 마감 스케쥴에 조금 고단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호텔 방 안에 혼자 앉아 커피 한 잔 내려놓고 이국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마감하는 건 다시 누릴 수 없는 호사다.



적어도 그때는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7개월 아기와 내니가 부산스럽게 놀고 있는 거실 한복판, 어지럽게 젖병이 뒹구는 식탁 앞에 앉아서 마감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래도 럭키야,

엄마는 네가 있어서 행, 행복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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