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요즘은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인 상황에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럴 때 나는 보통
‘주로 상상이다. 상상이 훨씬 재밌는 스토리다. 본인 이야기는 본인만 재밌고 즐겁고 아련하다.’
라고 대답한다.
캐릭터의 직업군에 있어서는 가끔 경험이나 주변인들의 직업을 가져다 쓸 때가 종종 있지만 큰 맥락의 줄거리, 배경, 에피소드, 상황, 혹은 감정들까지도 8할은 자료 조사나 상상이 바탕이 되었다.
나는 내가 직접 겪은 경험보다는 상상으로 쓴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숱하게 많은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그리고 몇 몇 도시들은 장기 체류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곳을 소설의 배경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물론 해외에서의 에피소드가 필요할 때 모르는 나라보다는 아는 나라가 더 쓰기 수월하기 때문에 장기 체류 경험이 있는 밴쿠버나 쿠알라룸푸르를 가져다 쓴 적은 있지만 주인공들의 출장이나 유학 에피소드 등 짧은 등장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내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다.
2021년 봄부터 늦여름까지, 나는 반 년 동안 파리에 살았다. 20대 후반에 친구와 함께 파리에 2주 간 머문 적 있었으니 거의 10여 년 만이었다.
2021년은 아직 코로나가 전세계에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한국에는 확진자가 많지 않았던 반면 프랑스는 하루에도 수만 명씩 발생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프랑스는 특별한 사유 없이는 입국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비자 허가가 나서 이미 파리에 가 있었고, 나는 국경 정책이 조금 느슨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생이별 한 달 후, 나는 남편이 있는 파리로 갈 수 있었다.
코로나 시절, 프랑스로 출국할 때 인천공항은 인적이 드물었다
입국자들은 일주일간 격리를 하고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했다. 가족과 동거, 식재료나 의약품 구입을 위한 외출은 가능했던 격리 아닌 격리였지만 검사를 받고 나면 파리 곳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음성 결과를 기다렸다.
검사하려고 기다리던 사람들. 3월 말쯤인데도 엄청 추웠다.
그러나 검사 다음 날 새벽 도착한 청천벽력같은 메일.
양, 양성? 내가 코로나 확진자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확진자가 적었고 내 주변에서 코로나에 걸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병원에서 PCR 검사를 받았고, 이후로는 마스크를 벗고 누군가를 만난 적없었다.
프랑스에 도착해서도 만난 사람은 남편 뿐, 외출은 식재료 사러 딱 한 번 마스크를 쓰고 마트에 나간 게 전부였다. 도대체 어디서 감염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일한 접촉자인 남편은 음성 판정을 받았고, 이후로 우리는 내 양성 결과를 오류라고 생각하고 있다)
열흘 간 다시 격리를 해야 했다. 이번에는 남편도 없이 혼자였다. 가족과 함께 격리해도 되지만 그럼 함께 있는 가족원은 확진자의 격리기간이 끝나고 다시 일주일 격리를 추가로 해야했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 방을 따로 얻어서 각자 생활했다.
격리중일때 남편이 전화를 걸어 창밖을 내다보라고 했다. 저 멀리 다른 방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남편이 보인다ㅋ
프랑스의 자가격리는 한국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식재료나 의약품 구입을 위해서는 외출도 가능했다. (산책이나 운동도 가능하다고 듣긴 했으니 확실하진 않음) 그런데 소심한 나는 남의 나라에 와서 괜한 민폐를 끼치게 될까봐 일절 외출을 하지 않았다. 음식은 음성 판정이 나온 남편이 사다가 호텔 방문 앞에 내려놓고 갔다.
남편이 사다 날랐던 식량들
입국 후 일주일에 이어(그래도 그땐 남편이라도 옆에 있…) 열흘이나 더 혼자 호텔방에서 지내다 보니 점점 기분이 처지기 시작했다. 암울했고 쓸쓸했다.
밤만 되면 호텔 건너편 건물에서는 시끌벅쩍한 홈파티가 열렸고, 주말에는 호텔 앞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왜 저렇게 부대끼는 사람들이 아닌 내가 코로나에 걸린건지 파리의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만난 사람도, 증상도 없어서 검사 결과도 미심쩍었다. 그러다 보니 분노는 프랑스로, 파리로, 향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 사망한다는 유럽에 가는 것보다는 한동안 남편과 떨어져 한국에서 지내는 게 안전할 거라고, 말리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꾸역꾸역 프랑스까지 온 내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우울감이 극에 달했을 때, 비로소 격리 기간이 끝났다. 격리 후 코로나 검사를 받을 의무는 없었지만 확실한 결과를 위해 다른 라보에 가서 검사를 받았고 당연히(?) 음성 판정을 받았다.
자유를 얻은 그 날,
아주 오래 파리 시내를 걸었다.
13구의 호텔에서 출발해 이딸리 광장을 거쳐 고블랑 가로 갔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줄줄이 늘어선 카페와 식당들의 실내 영업은 금지였지만 테이크 아웃은 가능해서 커피를 한 잔 주문해서 손에 들었다.
고블랑 가 끝의 교차로에서 어디로 길을 잡을까 하다가 큰 대로변 대신 비좁은 골목길을 선택했다. 골목 양 옆으로 빵집, 카페, 식당, 기념품가게, 생선가게, 책방이 줄줄이 이어졌다. 관광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무프타르 시장 사람들은 생기넘쳤다.
골목의 끝은 꽁트르스카프 광장이었다. 아담한 광장을 둘러싸고 카페들이 있었다. (그땐 몰랐지만 헤밍웨이가 이 광장의 카페 중 하나를 ‘무프타르 가의 시궁창’이라고 부르는 단골집이었다고…) 나중에 실내 영업이 가능해지면 꼭 이곳에서 커피를 마셔야겠단 생각을 했었다.
나는 조금 지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팡테옹을 바라보며 걷다가 팡테옹이 나오면 다시 뤽상부르를 향해 걸었다.
뤽상부르공원에서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는 중
파리는 10년 전 내 기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리고 17일간 켜켜이 쌓였던 우울과 분노는 불과 두세 시간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50년 헤밍웨이가 한 친구에게 보낸 글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자네가 아주 운이 좋아 젋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지낼 수 있다면 남은 평생 어디를 가더라도 파리에서의 추억이 자네와 함께할 걸세, 파리란 이동축제일처럼 언제나 축제와도 같은 곳이니까 말이지.’
<A Moveable Feast (찰스 스크리브너 선즈, 1964), 헤밍웨이 내가 사랑한 파리 (어니스트 허밍웨이, 한길사) 재인용>
파리는 그런 도시였다.
노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동네 빵집의 바게트에 재래 시장에서 산 치즈를 끼워 먹어도, 비가 오는 파리의 거리를 걸어도, 꽃들이 만발한 공원에 앉아 값싼 샌드위치를 먹어도 특별한 하루가 될 수 있는 곳.
하늘, 구름, 공기, 냄새, 하다못해 로맨틱한 건물의 차양 끝에서마저 마치 내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운치가 배인 도시.
사람을 말랑말랑한 감성에 빠지게 만드는, 언제나 축제같은 이 도시의 경험을 그저 기억 속에만 묻어두는 것은 로맨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직무유기와 같다.
한국에 돌아온 뒤 소설을 썼다.
여주인공이 그림 같이 멋있는 남자 주인공과 처음 만나는 콜마르로 가는 기차는 남편과 내가 떠났던 여행의 기억이었다. 샛노란 꽃들이 가득찬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던 차창 밖의 풍경은 여전히 눈에 선했다.
그때의 풍경이 영상으로만 남아있어서 캡쳐했다.
주인공들이 첫 데이트를 하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는 에귀샤임. 남편과 프레즐과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걸었던 동화 같은 마을이었다.
주인공들이 두번째 우연한 만남을 가지는 콜마르의 작은 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
동화 그 자체인 마을 에귀샤임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파리의 작은 호텔. 꽁트르스카프 광장을 마주한 그곳은 가상의 장소지만 호텔에 딸린 것으로 설정한 카페는 남편과 내가 주말 아침 산책을 나왔다가 아침을 먹은 곳이었다.
그들이 걸었던 도시 곳곳의 거리는 모두 내가 걸었던 길이었다.
심지어 여자주인공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이방인임을 실감한에피소드였던 오피(OFII) 등록 신체검사도 내가 겪었던 일이고, 여자 주인공의 연적인 캐릭터가 살고 있는 호텔은 내가 살았던 곳이었다.
그들이 좋아한 무프타르 시장의 크레페 가게, 재회한 두 사람이 함께 장을 보던 주말 시장, 등장하는 카페와 식당들까지. 6개월 간의 내 파리 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소설 ‘우리 가까이 함께(밀리의 서재, 2022)’가 파리에서 살았던 다음 해에 출간됐다.
우리가 좋아했던 무프타르가의 크레페 가게.
유럽 여행 중 프랑스 소도시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아름다운 한 남자를 만나고 결국 사랑에 빠진 전도유망한 젊은 여자. 모든 걸 버리고 파리의 삶을 선택했고 온 마음과 열정을 다해 사랑했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 변해가는 마음과 싸워야 했던 이야기. 그들의 이별과 재회, 그 모든 배경에는 파리라는 도시가 존재했다.
..
가끔 생각한다.
나는 다시 파리에 갈 일이 있을까?
그때 나는 행복했고, 즐거웠고, 도시는 늘 환상적으로 아름다웠지만 내게 파리에 갈 시간과 돈이 주어진다면 과연 또 그 도시를 선택할까?
이미 20대에 2주, 30대에 6개월을 살아봤으니 아마도 나는 다른 도시를 찾을 것이다. 파리만큼 아름답지만 아직은 가보지 못한 낯선 도시.
그렇지만 헤밍웨이의 말처럼 언제나 축제였던 파리는,
그 곳에서 젊은 내 인생의 한 때를 보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언제까지나 추억할 도시로 내 삶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