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양 Aug 14. 2024

갑과 을, 그 사이 어딘가쯤

양곤




평일 낮 우리집 거실은 여자 셋 아기 하나로 북적거린다. 내니인 N은 럭키의 기저귀를 갈고, 딴딴은 럭키의 장난감을 소독티슈로 닦고 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두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미얀마어로 쉼없이 수다를 떤다.



식탁에 앉은 나는 귀에 버즈를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뭐라도 써보려고 용을 쓰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쉽지 않다.


럭키가 잠들어 있을 땐 그나마 고요..



결국 주방으로 가서 이유식으로 쓸 브로콜리를 다듬고 씻어서 찜기에 올려놓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인다.



“커피 마실래?”



주방에서 잠깐 나와 묻는다. N은 항상 예스, 딴딴은 늘 노 땡큐다. 딴딴은 오전에 다른 청소 일을 하고 오는데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온단다.



내 컵에는 갈색 커피 알갱이만 든 인스턴트 커피를 두 스푼, N의 컵에는 커피 설탕 프림이 든 인스턴트 믹스 커피를 털어넣는다. 그런 믹스 커피를 3in1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집에는 N만 마시는 선데이라는 브랜드의 커피가 준비되어 있다. (나름의 복지랄까)



커피만 내놓는 일은 없다. 쿠키나 비스킷, 빵이나 케이크, 하나 못해 삶은 달걀이나 과일이라도 같이 꺼내놓는다. 육아는 보기보다 훨씬 체력소모가 크고, 몇 시간째 청소를 한 수고가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앞에서 낯을 가리는 딴딴은 간식을 줘도 거의 먹지 않는다. 처음에는 재차 권하곤 했는데 이제는 부담스러울까봐 그냥 넉넉히 준비해서 식탁에 내놓을 뿐이다.



커피를 마실 때 럭키는 보통 점퍼루에 넣어두거나 아기 식탁 의자에 앉혀 떡뻥을 주곤한다.



가끔 점퍼루도, 식탁 의자도 거부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내가 먼저 일어나 럭키를 안아 든다. 커피 한 잔 마시는 동안에는 마음 편히 쉬라는 뜻이다.



“딴딴한테 우리 집 일 어떤지 물어봐줘. 힘들지는 않은지.”


커피를 마시는 N에게 통역을 부탁한다. N이 묻자 딴딴은 수줍게 웃으며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안심이다.



사실 딴딴 이전에 먼저 구한 파트타임 헬퍼가 있었다. 지금까지 사무직으로만 일해왔다는 그녀는 마흔일곱 살의 싱글맘이었다. 몸 쓰는 일을 하지 않았었는데 헬퍼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자신있어하는 태도와 N보다 더 능숙한 영어가 마음에 들어 채용했었다.


하지만 이틀 일한 그녀는 아프다며 그 다음 이틀간 출근하지 않았고,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연락이 두절됐다.



(일주일쯤 지나서 N을 통해 이틀치 일한 삯을 계산해준다고 연락 했더니 콘도 로비로 와서 받아갔다)



풀타임 헬퍼는 좁은 집에 부대끼기만 할 것 같아서 파트타임 헬퍼를 구하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그런데 4시간씩 5일만 일하는 딴딴의 시급을 한달치로 계산하면 풀타임 헬퍼 월급과 3만 원도 차이가 안 난다는 사실….) 그러다 남편의 회사 동료가 사무실을 청소하는 딴딴을 추천했던 것이다.



청소 경력이 오래 된 딴딴은 비록 영어는 못했지만 손이 빠르고 부지런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경험을 세게 겪고 나니, 나는 그녀가 오랫동안 우리집에서 일했으면 했다. 일을 하면서 불편한 점이 없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자연스럽게 눈치를 살피게 됐다.



..



딴딴도 이렇게 소중한데, N에 대해서는 오죽할까.



표면상으로 N은 아기를 돌보는 내니지만 그녀는 미얀마어를 하지 못하는 내게 개인비서나 마찬가지다.



푸드판다에서 음식을 주문한 뒤 배달원이 집을 찾지 못하거나 로비에 도착했을 때 전화를 걸어오는데 N이 없으면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다. 마트 앱에서 식재료를 주문했을 때 재고가 없으면 역시 전화가 오는데 그것도 N이 전화를 받아줘야 한다.



화장실의 수납함 문이 안 열리거나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으면 콘도 관리실에서 엔지니어를 보내는데 그때 역시 N이 나 대신 상황을 설명하고, 엔지니어의 설명을 내게 전달해준다.



(N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던 터라 문법과 발음이 매우 개성있다. 영어능력자인 남편은 그녀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N과 영어 실력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같이 지내온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대충 서로 뜻이 통하는 정도의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하다.)



엄마와 언니가 양곤에 왔을 땐 가이드처럼 함께 다녀주었다.



내니 일은 물론 다른 궂은 집안일도 척척, 헬퍼와 내니 경력이 오래되다 보니 눈치와 순발력도 빠른 편이다.



만약 N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나의 양곤 생활 자체가 마비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약간의 단점들은 눈 감아주는 편이다. 잦은 지각이라거나, 출근 후에도 아주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한다거나, 돈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거나, 그런 것들.



일한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 미얀마 최대 명절인 띤잔 연휴가 있었다. 자기 친구가 보너스를 받았다며 간접적-이지만 요구하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으로 보너스를 달라고 이야기했다. 또 우리가 이사한 후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한다며 버스비 이야기를 반복해서 꺼내기도 했다. 물론 우린 그녀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요구한 대로 들어주었다.



토요일마다 외출을 하는데 식당에 가서 눈치보지 않게 음식을 주문할 수 있도록 하고(원래는 식사 제공을 안 하는 것으로 고용) 여유있게 식사를 할 수 있게 럭키는 남편이 돌본다.



한국에 다녀올 때는 N의 아들 영양제와 문구류를 선물로 챙기고, 현지 마트에서 한국 과자가 보이면 아들을 가져다 주라고 사주기도 한다. 가끔 음식을 주문할 때 조금 더 주문해서 퇴근길에 들려보내기도 한다.



지각은 했더라도 퇴근은 늘 10분~30분 정도 일찍 시켜준다.



나름 배려를 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돈을 더 많이 준다는 집으로 이직을 고려할까봐 걱정이 될 때가 있다. 종종 그녀가 다른 집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돈보다 마음 편한 일이 좋다며, 우리집도 좋고 나도 좋고(?) 럭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코로나와 쿠데타 이후 먹고 살기 빡빡한데 요즘 들어서는 물가까지 심각하게 오르고 있는 미얀마인지라 돈을 더 준다고 하면 옮기고 싶은 마음이 왜 들지 않겠는가. (나라도 당연히 흔들릴 듯….)



버스비 이슈가 있을 때 우리는 일한지 4개월 차인 N의 월급을 올려주었다. 그때 내년 인상해줄 것을 미리 해준다고 말했고 그녀도 기뻐하며 동의했었다. 하지만 미얀마 물가가 이렇게 치솟는 마당에 막상 내년에 월급 인상을 안 해주기는 힘들 것 같다. 다른 집보다 더 잘해주지는 못할 지언정 우리집에서 일하며 손해는 안 봐야지.



이처럼 우리는 돈을 주고 고용하고, 돈을 받고 일하는 위치에 있지만 고릿적 갑을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딴딴과 N의 노동력이, 그녀들은 일자리가 필요하기에 서로를 배려하고(혹은 눈치를 보고) 맞춰가며 지내고 있다.



..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도 비슷하다.



출간 계약을 맺을 때 서류 상으로의 갑은 늘 나였고, 을은 출판사였다.



(네이버 국어 사전에 갑을관계를 검색해보면 ‘…일반적으로 갑은 유리한 위치에 있는 자를, 을은 불리한 위치에 있는 자를 나타낸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작가를 갑의 위치에 써주는 건 그저 계약서상의 의전이랄까. 저자의 면을 세워주는 차원일지도 모른다.



20년 가까이, 20번 넘게 갑의 이름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그 관계에서 내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기억은 없다.



오히려 초창기에는 을에 가까웠다. 경력도 없는데다 나이도 어려서 세상 물정 잘 몰랐고 주눅도 많이 들었다. 어떤 출판사의 한 나이든 남자 편집자는 ‘다음 책은 좀 더 좋은 결과가 있겠죠 뭐’ 라며 대놓고 비아냥거리며 인세 정산을 해주었었다. (당연히 그 출판사와 다시는 일하지 않았다)



좀 더 경력이 쌓이고 만나게 된 출판사(편집자)들은 언제나 깍듯하고 예의있게 대우해주었지만 그렇다고 책 한 권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내가 ‘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다.



편집자(출판사)와 가장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오고 가는 단계는 수정 작업을 할 때 인데

아주 간혹 ‘굳이 이런 것까지…?’ 라고 느낄 정도의 피드백이 올 때가 있다.



감정을 이렇게까지 말로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한다고? 너무 유치한데.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인데 굳이 바꿔야 한다고? 더 어색한데.



네이버 지식백과를 보고 왔나? 현지인들은 혼용해서 쓰는 말인데.



이 정도의 기본 상식을 따로 설명해야 한다고? 독자들이 자존심 상할 듯….



아니,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이 등장인물 나이대의 가치관에서는 쓸법한 단어라고!



뭐랄까.



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아니면 기싸움 같은 건가 싶기도 하다.



그럴땐 잠시 원고를 내려놓기도 한다. 마음이 꼬인 채로 작업을 해봤자 결과물이 좋을 리 없다.



커피 한 잔 하면서 다른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함께 글을 쓰며 오랫동안 알아 온 지인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면서 감정을 조금 가라앉히면 꼬였던 마음이 슬그머니 풀린다.



상대방과 나의 목표는 같다. 글을 잘 고치고 다듬어서 좋은 책을 만들고 그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들이 나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불편한 심기는 부족함을 드러내 보인 나의 자격지심일 뿐, 책을 읽게 될 불특정 다수의 눈으로 건네는 조언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물론 간혹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건 내 뜻대로 밀어붙이기도 하지만)



..


나는



N과 딴딴과는 ‘건강한 양육’과 ‘쾌적한 양곤 생활’이라는, 편집자(출판사)와는 재미있는 책을 만들어 많이 판매하고자 하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갑을 관계가 될 수 없다. 서로를 견제하는 불필요한 소모도 의미가 없다.



오늘도 딴딴은 땀 흘려 청소를 하고, N은 낮잠을 자지 않으려는 럭키와 씨름하고 있다. 최근에 함께 일한 편집자는 플랫폼과 프로모션을 진행한다며 메일을 보내왔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뛰고 있으니,



나도 오늘 이유식을 성심껏 만들고,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





 

   


이전 05화 19년 전 첫 해외 여행, 첫 소설 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