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캐나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캐나다 국내와 미국을 제외하면 여행 경험이 거의 없었다. (어릴 적 패키지 여행으로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간 기억은 있다고….) 캐나다와 미국도 성인이 되기 전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첫 해외 여행이 나와 연애 시절 떠난 태국 방콕이었고 그 다음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로 갔던 우리의 신혼여행이었다.
신혼 여행에서 유럽 여행의 참맛을 알아버린 남편은 일명 유럽병, 여행병에 지독하게 시달렸지만 평범하게 회사 다니는 직장인이 비행 시간만 10시간이 넘는 유럽 여행을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반 년이 넘어가던 어느 날, 우리는 꼭 유럽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다녀올 때가 됐다는 결정을 내렸다.
남편은 이전에 하던 일과 전혀 다른 직종으로 이직한지 1년차였는데 적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서 잘 적응해주었다. 그에게 선물 같은 휴식을 주고 싶었다.
(사실 결혼 전에는 일 년에 서너 번은 여행을 다녔던 나로서도 오래 참은….)
급하게 내린 결정이라 시간이 촉박했다. 가고 싶은 곳보다는 갈 수 있는 곳, 경비와 일정이 우리에게 맞는 곳을 찾았다.
그리하여 떠나게 된 하노이 여행 며칠 전,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판매량이 기대에 못 미쳤던..
‘사랑할 일은 절대 없어 (파란미디어, 2018)’는 전년에 종이책으로 출간했던 소설인데 전자책으로 플랫폼에 순차적으로 풀리는 중이었다.
그 중 한 곳으로부터 외전을 선공개하는 조건으로 프로모션 제안을 받은 것이다.
담당 편집자는 부담을 느낄까봐 걱정을 하는 듯했지만 나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이렇게 내 책을 많이 팔아보려고 노력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당연히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야했다. 이전부터 판매량 증가나 프로모션을 위한 외전 제안은 대부분 두말 않고 쓰는 편이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반 년도 더 전에 출간을 하고 그 이후로는 다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소설이라는 것.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다시 익혀서 외전으로 쓸만한 연결고리를 찾아야 했고, 캐릭터와도 다시 친해져야했다.
나머지 하나는 역시 마감 날짜.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며칠 뒤 나는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노트북을 들고 여행을 갈까,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들고 간 수고만큼 소설을 써올 것 같지 않았다. 가져온 노트북이 계속 생각나면 여행은 여행대로 김빠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계획을 세웠다.
1. 여행 전까지는 소설을 다시 읽고 쓰던 당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2. 여행가서는 틈날 때마다 외전 에피소드를 구상하기.
3. 여행에 돌아와서 마감날까지 미친듯이 원고 완성하기.
돌아와서 원고를 쓰기 시작하면 시간이 촉박하긴 하겠지만 마감이라는 압박이 집중력을 높여주리라 기대했다.
..
하노이는 우리의 첫 베트남 여행지였다.
하노이 가던 날
솔직히 하노이에 흥미를 끄는 관광지가 많은 것은 아니었고, 그나마도 날씨가 무더워서 돌아다니기 힘들었지만 오랜만의 여행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즐거웠다.
관광지 보다는 유명 식당이나 카페 위주로 여행했다. 오바마가 다녀간 걸로 유명한 분짜 흐엉리엔, 반미25, 분보남보, 콩카페, 피자 포피스, 세계 어디서든 우리의 휴식처가 되어주는 스타벅스까지. (나는 여행지의 스타벅스 에스프레소 잔을 수집한다)
그 중에 분짜 흥엉리엔과 피자 포피스는 너무 내 입에 찰떡이라 한 번 더 방문하기도 했다.
(하노이에서 베트남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이후로 다낭, 호이안, 나트랑, 달랏까지 여행해보았다. 그 중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은 곳이 하노이와 달랏이다.)
카페에서 더위를 피하며 잠시 휴식을 취할 때마다 나는 종이와 펜을 꺼내들었다. 저가항공에 위탁수하물 없이 꼭 필요한 옷가지만 몇 벌 챙겨온 터라 수첩이나 다이어리도 무게를 차지할까봐 이면지 서너 장 챙겨온 것이다.
콩카페에서.
핸드폰으로 해도 되지만 태생이 아날로그적 인간인지라 종이에 펜으로 낙서하듯 뭐라도 끄적여야 상상력이 부풀어 올랐다.
외전에는 무슨 이야기를 쓰는 게 좋을까. 본편에서는 생략되었던 주인공들의 첫만남을 그리는 것도 괜찮겠다. 그걸 읽으면 두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깊은지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편은 남자주인공이 오래 전 자신이 고백을 거절한 여사친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터라 그가 왜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 아쉬웠다는 출간 후 리뷰를 본 기억이 난다. 그럼 그때의 남자주인공의 심리를 다룰 수 있는 에피소드를 외전에 추가하는 걸로 아쉬웠던 분들에게 사과해야겠다.
이것만으로는 분량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럼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준 주인공들의 친구 이야기를 넣어야 겠다. 겉모습은 가벼워 보이지만 서로를 돌고도는 친구들을 곁에서 따뜻하게 지켜봐 준 돈 많고 잘생기고 훈훈한 남자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해피엔딩을 만들어주는 것도 따뜻할 것 같다.
이국적인 언어와 음악이 흘러나오는 여행지의 카페에 사랑하는 사람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에피소드를 위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니 일처럼 느껴지지 않고 즐거웠다. (물론 노트북을 꺼내들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소설을 썼다면 일처럼 느껴져 약간 스트레스를 받았을 듯….)
마사지 예약 시간 기다리며 마사지샵 맞은편 분위기 아늑했던 카페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남편은 다시 매일 아침 회사로 출근하고, 나는 마감날까지 쉬지 않고 글을 써야하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빡빡한 일상을 떠나와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낯선 도시, 이국적인 공기, 색다른 음식, 친절한 사람들.
일상에서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낀다.
..
이미 완결이 나고 소설이 끝난 줄 알았지만 외전이라는,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현실에는 여행이 있다.
외전 없이 본편만으로도 삶을 이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외전을 통해 색다른 이야기를 경험하고, 모자랐던 부족함을 채우고, 놓쳐버린 아쉬움을 달랜다면 내 삶은 더욱 충만해진다.
(소설의 외전은 내게 돈을 벌어다주지만 일상의 외전은 돈을 써야 한다는 게 치명적인 차이점이지만.)
얼마 전 작년에 출간한 ‘고백의 순간(북큐브, 2023)’의 외전도 출간됐다.
지금까지 썼던 외전들이 본편의 판매량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따로 계산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본편을 보고 아쉬움을 느꼈던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채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