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양 Aug 23.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일이라서.

에필로그. 밴쿠버의 겨울



서른 즈음에 소설 쓰기를 완전히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었다.



내게 탁월한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결과는 늘 애매모호했다. 어쨌든 글을 쓰면 출판이 가능했고 근근이 먹고 살았다. 하지만 성공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정도로 처참하지도 않은 지지부진한 작가의 삶에 진절머리 났다.



작가라는 길에서 희망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다른 길을 찾기 위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필리핀과 캐나다를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글쓰기와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



(이전 글 ‘캐나다에서 마주친 나의 20대’에도 썼지만,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밴쿠버 도서관에서 내 책을 발견한 뒤 언젠가 다시 글을 쓰겠다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기껏 영어 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뒤 곧장 전업 작가의 삶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나이는 많고 경력은 일절 없어 걱정했지만 주위의 도움을 받아 외국계 회사의 프로젝트 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급하게 인력이 필요한 두 달 짜리 단기 일자리였지만 페이가 높았다. 7시까지 출근이라 5시 20분에 기상했다. 새벽 5시 20분에 일어나는 것보다 아침까지 잠을 안 자고 글을 쓰는 게 훨씬 쉬웠던 과거의 작가 생활과 정반대의 삶이었다.



피곤했지만 직장생활은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커피를 내렸다. 책상에는 프로그램에 넣어야 할 서류들이 늘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임금과 관련된 일이라 정확도가 생명이었다. 서류 내용, 관련 메일, 담당자의 허가 등등을 체크하고 확인된 부분들을 액셀에 정리했다. 점심 시간이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사무실 근처를 산책하기도 했다. 늘 혼자 방이나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외국인 반 한국인 반의 다국적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그 당시 내 책상..사진에 잡히지 않은 바로 옆 공간에 저 서류철이 항상 한 가득 쌓여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가야할 곳이 있다는 약간의 의무감도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동의 대가로 받는 월급은 황홀할 정도로 달콤했다. 종이책 한 권을 힘들게 써봤자 내 손에는 300만 원도 채 쥐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첫 달 받은 월급이 500만 원이 넘었다. (외국계 프로젝트팀, 단기알바라 시급 자체가 어나더레벨이었고 매일 2시간씩 오버타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일이 밀려 1.5배 시급을 받는 토요일에 두세 번 출근하면 그 달의 월급은 거의 700만 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늘 빠듯한 생활비에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서는 간간이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던 예전의 소박한 소비 습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사고 싶은 걸 걱정 없이 사고, 부모님께 용돈을 턱턱 드리고,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맛있는 걸 사줄 수 있는, 돈 쓰는 재미에 푹 빠졌다.



계약된 두 달이 되기 전에 미국인이었던 프로젝트 매니저는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때까지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나는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프로젝트 사무실이 문 닫기 직전까지 반 년 정도 더 일을 했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곧장 비슷한 계열의 다른 프로젝트로 옮겨갔다. 역시 3개월 짜리 단기 아르바이트였다. 소설 쓰기는 커녕 책 한 줄 읽지 않은 채 정신 없이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고 살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가끔 했던 것 같다.



일이 어렵거나 싫은 건 아니었지만, 1년도 안 되는 어학연수로 쌓은 얄팍한 영어 실력으로는 이 바닥에서 계속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프로젝트를 끝내고 다시 캐나다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할지 고민에 빠졌다.



계약된 3개월이 끝나갈 무렵, 프로젝트에서는 고맙게도 또 연장 제안을 해주었다. 그런데 포지션이 단순 자료 업무에서 교육 파트로 바뀌는 것이었고 현장 근로자에게 안전 교육을 하는 외국인 직원을 따라다니며 강의를 통역하는 일이었다.



함께 아르바이트 하던 어린 친구들 모두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가뜩이나 영어 실력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던 나는 통역 제안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같이 일하던 동료는 처음만 좀 고생하면 늘 매번 비슷한 강의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거라고 조언해주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연장 제안을 거절하고 프로젝트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밴쿠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




좋았던 기억만 남아 있던 밴쿠버로 돌아간 초반에는 너무 즐거웠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튜터가 있었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해외에서 보낸다는 사실도 행복했다. 작은 어학원에 등록해서 영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던 연말의 게스타운



얼마간은 정말 재밌게 지냈다. 그런데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되면서부터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날씨의 영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여름에만 밴쿠버에서 보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겨울의 레인쿠버 시즌. 매일 매일 우중충한 구름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다 그치길 반복했다.



설상가상 문제가 많았던 어학원에 싫증이 나서 점점 수업을 빠지기 시작했다. 어학원에서 연계해준 스튜던트 하우스에 살고 있었는데 10대 아이들의 무분별한 생활과 소음에도 진절머리 나서 거처도 옮겼다.



아침에 학원에 가기 위해 남은 의지를 끌어모아 집을 나서보지만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그냥 정처없이 버스를 타고 다녔다. 추적추적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차창 밖의 밴쿠버를 바라보며 음악만 들었다.



아무 정거장이나 내려  눈에 보이는 카페들어가서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셨다. 부슬비를 맞으며 근방을 산책했다가, 내렸던 정류장 반대편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어떤 특정한 고민이라기보다 지나온 내 인생에 대한 고찰과 반성,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생각과 신념을 가져야 할지, 미래에 대한 계획과 꿈에 대해서 그려보았다.



그 당시 나는 매일 우울하고 마음이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인생에서 한 번쯤은 겪어야 할, 가치관 확립의 시기를 서른을 넘겨 앓았던 것 같다.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정하다보니 결정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가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아야 할지, 아니면 다시 근근살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것인지.



결정을 내린 나는 남은 돈을 가지고 여행을 갔다. 혼자 라스베가스로 갔고, 비싼 좌석에 앉아 쇼를 봤고, 헬기를 타고 그랜드캐년을 돌아보았다.


안 찍겠다는 나를 설득해 억지로 한 장 찍어준 같은 헬기 탄 브라질에서 온 부부..고마워요. 이 사진 없었으면 헬기 탄 기억도 안 났을거야..



그렇게 질풍노도 밴쿠버의 겨울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다시 소설을 쓰는 전업작가가 되었다.


..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나는 성공하지 못한 소설가로 남아 있다.



가끔, 글이 너무 안 풀리거나 수정 작업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할 때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저 취미로 남겨두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을 때 그것이 정말로 순수한 즐거움인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그렇다고 500만 원, 700만 원씩 월급을 받던 그 직업의 길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어쨌든 글을 쓸 때 즐겁다. 책을 출간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으니, 일 때문에 다른 나라로 가야하는 남편을 부담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 지금도 양곤에서 아기를 키우며 부족한 시간이나마 쪼개어 글을 쓸 엄두를 낼 수 있다. 그저 태블릿 하나와 키보드만 있으면 일을 할 수 있다.



이제는 주류가 된 전자책 시장 덕분에 풍족하진 않아도 예전보다는 수입도 괜찮아졌다.



반면 내가 돌아가지 않은 고소득 프로젝트 일들은 관련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일자리 구하는 게 쉽지 않아졌다고 들었다. 같이 일했던 젊은 친구들 중에서 현재까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다들 영어도 잘하고 똑똑해서 본인 갈 길을 잘 찾아갔지만 워낙 이전에 나이나 경력에 비해 높은 페이를 받았던 터라 적응이 꽤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가난한 직업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먹고 살기 힘들진 않을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돈 때문에 선택한다고 해서 끝까지 잘 먹고 잘 살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는 작은 재능을 가진 것에 감사한다.




나는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고 벌써부터 가끔 글이 올드하다는 평을 보곤 한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어린 사람들이 보기에는 촌스러운 감성이 글에 배어 있을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지금은 출간이 가능한 로맨스 소설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쓰는 것이 내 목표다.)



언젠가는 단 한 사람도 내 소설을 읽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땐 어느 출판사에서도 내 소설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는 평이 줄줄이 달리며 상처입을지도 모른다. 그게 다음 소설이 될지, 그 다음 소설이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은 써야겠다.

 


소설을 쓰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니까.







<소설과는 색다른, 브런치 글을 쓰는 게 즐거웠습니다. ‘해외에서 마감하는 삶’의 첫번째 이야기는 10편으로 마무리 짓고 새 소설을 시작하러 갑니다. 소설을 쓰고나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09화 19년차 소설가지만 여전히 필사를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