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습 남침과 ‘폭풍’ 작전의 시작
4부에서 다루었듯 38도선은 이미 피로 얼룩진 전선이었지만, 1950년 6월 24일 토요일의 대한민국은 기만적인 평화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육군본부는 전군 장병의 1/3 이상에게 휴가 및 외출을 허락했고, 장마철의 궂은 날씨는 전방의 긴장감마저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38선 너머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조용히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남침 계획, 암호명 ‘폭풍(暴風)’ 작전이 개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운명의 그날, 한반도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 새벽이 밝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장대비가 쏟아지는 38도선 전역의 정적을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어둠과 안개를 뚫고 수백 개의 붉은 섬광이 남쪽을 향해 번쩍였습니다. 북한군이 보유한 2,000여 문의 각종 포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포격이 아니었습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설계한 전형적인 소련식 기습 작전의 서막이었습니다. 포격은 30분간 국군의 주요 방어 진지, 지휘소, 통신 시설, 포병 부대를 정밀하게 타격하여 지휘 체계를 마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새벽 4시경, 뇌우와 같은 포성이 38도선 전역에서 작렬했다. 적의 포탄은 우리 사단 포병대대에 집중적으로 낙하하여 유선 통신망을 순식간에 파괴했다." - 백선엽(白善燁), 당시 육군 제1사단장, 회고록 『군과 나』 中
포격이 멎자, 기다렸다는 듯 녹색 위장 페인트를 칠한 북한군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38도선을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국군 장병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철의 괴물, 소련제 T-34/85 전차가 육중한 궤도 소리를 내며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폭풍'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평양방송은 "남조선 국방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우리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불법적인 무력 침공을 개시했다"며 "인민군은 적의 침공을 격퇴하고 정의의 반격으로 넘어갔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내며 남침을 정당화했습니다.
'폭풍' 작전의 핵심은 서부전선이었습니다. 북한군 제1군단(군단장 김웅)은 제1, 3, 4, 6사단과 독립 제105전차여단을 동원하여 개성, 연천, 동두천, 의정부 축선을 따라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을 3일 안에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T-34 쇼크: 당시 국군에게는 전차가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대전차 무기라고는 미군이 지원한 2.36인치 로켓포(바주카)가 전부였지만, 이는 T-34의 두꺼운 전면 장갑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쏘아 올린 로켓탄은 적 전차의 장갑에 맞고 그냥 튕겨 나갔다. 전차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포를 쏘며 다가왔고,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흩어지기 시작했다." - 당시 전투 참가 병사의 증언
개성을 방어하던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대령)과 동두천-의정부 축선을 막던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화력과 전차의 충격 앞에 방어선은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특히 서울로 가는 길목인 의정부가 돌파되면서 수도 서울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서울의 육군본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전선은 교착 상태"라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허위 보고를 했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걱정 마십시오.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훗날 두고두고 회자되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남기며 현실을 외면했습니다.
모든 전선이 절망적으로 무너져 내리던 그때, 유일하게 기적과 같은 소식이 들려온 곳이 바로 춘천이었습니다. 북한군 제2군단(군단장 김광협)은 춘천을 신속히 점령한 후 남하하여 서울을 동쪽에서 포위, 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춘천을 방어하던 육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달랐습니다. 잦은 국지전 경험으로 적의 침공 가능성을 예견한 김종오 대령은 전 장병의 휴가와 외출을 통제하고 진지를 보강하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6사단은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자마M자 즉각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특히 105mm 곡사포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소양강을 건너려던 북한군을 강물 속에 수장시켰습니다. 또한, 병사들은 박격포탄이나 수류탄 다발을 안고 적 전차 밑으로 뛰어드는 육탄 공격으로 여러 대의 T-34 전차를 파괴했습니다.
이처럼 처절한 6사단의 분전 덕분에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에서 무려 3일간 발이 묶였습니다. 이는 서울 함락을 전제로 한 '폭풍' 작전 전체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했습니다. 춘천에서의 3일은 남한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하고, UN군이 참전을 결정하며,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천금 같은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한편 동해안에서는 북한군 정예 특수부대인 제766독립연대가 상륙정을 이용해 강릉, 삼척 일대에 기습 상륙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국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동해안 축선을 따라 남하하여 부산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8사단이 이들을 맞아 싸웠지만, 전후방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으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는 '폭풍' 작전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치밀하게 계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하루 동안,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서부전선의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정부와 군 수뇌부는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춘천의 6사단은 나라의 운명을 건 위대한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위해 시작된 '폭풍'은 이제 막 그 서막을 열었을 뿐이었습니다. 전 세계는 이 작은 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이 냉전 시대 최초의 열전(熱戰)이자,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대리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폭풍은 이제 서울을 향해, 그리고 한반도 전체를 향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