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반도 전투 등 6.25 발발 이전, 이미 시작된 국지전
3부에서 우리는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정치적 승인을 받아내며 전쟁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남침의 'D-Day'인 1950년 6월 25일 이전, 38도선은 결코 평온한 경계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2년 넘게 피와 화약 냄새가 마르지 않는 '작은 전쟁터'였습니다.
6.25 전쟁이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라는 진실, 즉 전쟁 이전에 이미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의 치열했던 국지전 기록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945년, 미소 양군이 군사 분계선으로 임의로 그은 38도선은 행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최악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산맥의 능선이나 강의 흐름을 따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도 위에 직선으로 그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진지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하는 곳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유발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향한 선전 방송과 욕설로 시작된 마찰이, 이내 정찰대의 월경과 총격전으로 비화했습니다. 공식적인 기록만 보더라도 그 빈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1949년 한 해 동안 38도선 일대에서 발생한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은 총 874건에 달했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 기록 中
이는 거의 매일 2~3건의 교전이 벌어졌다는 의미입니다. 38도선은 더 이상 선(line)이 아닌, 피가 흐르는 전선(front)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수많은 국지전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상징적인 장소는 단연 옹진반도(甕津半島)였습니다. 황해도 남서부에 위치한 옹진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만 육지로 북한과 맞닿은, 남한 입장에서는 완전히 고립된 '육지의 섬'이었습니다.
이곳을 지키던 부대는 "싸우는 17연대"라는 별명을 가진 육군 제17연대였습니다. 연대장 백인엽(白仁燁) 대령의 지휘 아래, 17연대는 "맞으면 두 배로 갚아준다"는 식의 공격적인 방어 작전으로 유명했습니다.
피로 얼룩진 고지 쟁탈전: 국사봉과 은파산 전투
옹진반도의 국지전은 주로 전략적 고지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벌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전투가 1949년 5월 4일부터 약 한 달간 이어진 국사봉(國師峰) 전투입니다.
북한군이 먼저 옹진반도의 감제고지인 국사봉을 점령하자, 17연대는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수차례의 공격과 방어 끝에 결국 국사봉을 탈환했지만,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웬만한 전투를 방불케 하는 희생을 치렀습니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한 병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일이 반복됐다. 오늘 우리가 점령하면 내일 새벽엔 저놈들이 기습해왔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전우들이 쓰러져 나갔다. 6.25가 터지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전쟁을 하고 있었다."
논란의 '북진(北進)'과 해주시 포격 사건
옹진반도의 충돌은 단순히 방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7연대는 북한군의 포격이나 기습에 대한 보복으로 종종 38선을 넘어 북한 지역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49년 6월, 북한군이 연대 본부가 있던 옹진읍에 포격을 가하자, 17연대 포병대는 38선 너머 북한의 주요 도시인 해주(海州)시에 보복 포격을 가했다는 '해주시 포격 사건'은 유명합니다.
이 사건은 남한의 '북진' 의도를 보여주는 증거로 북한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훗날 남침의 명분 중 하나로 활용되었습니다. 남한 측은 이를 북한의 도발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처럼 38선 너머를 공격하는 행위는 이미 '국지전'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옹진반도뿐만 아니라 중부 전선의 개성(開城) 인근도 주요 화약고였습니다. 특히 개성을 남쪽에서 감싸고 있는 송악산(松嶽山)은 1949년 5월, 옹진반도 전투와 거의 동시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육군 제1사단이 방어하던 송악산 일대에서 북한군은 압도적인 포병 화력을 동원해 주요 고지들을 점령했습니다. 1사단은 필사적으로 반격에 나섰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고지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박격포탄을 들고 북한군의 진지로 돌진한 그 유명한 육탄10용사가 이곳 송악산 전투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렇다면 2년 넘게 이어진 이 끈질긴 국지전은 6.25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 북한의 입장: 국지전은 남한의 방어 태세와 국군의 전투력을 시험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리허설'이었습니다. 어느 지역이 취약한지, 국군의 대응은 어떤지 등 귀중한 군사 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남한의 보복 공격을 '북침 도발'로 포장하여 내부 결속을 다지고, 남침을 '정의의 해방 전쟁'으로 선전할 명분을 쌓았습니다.
* 남한의 입장: 잦은 국지적 승리는 오히려 '치명적인 자만심'을 낳았습니다. 특히 옹진반도 등에서 북한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경험은 "북한군도 별거 아니다. 전면전이 나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안일한 인식을 군 내부에 퍼뜨렸습니다. 38선에서의 소규모 전투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 뒤에서 T-34 전차와 야크 전투기를 동원한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의 포성은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전쟁의 '확전'이었습니다. 38도선에서의 잦은 충돌은 남북 양측의 적대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렸고, 군사적 해결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인식을 굳혔습니다.
폭풍전야는 고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폭풍들이 연이어 몰아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거대한 태풍을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태풍이 한반도를 덮치는 순간만이 남아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