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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라운드, 그리고 나의 작은 연극

by 김정락

오늘도 나는 배우처럼, 조용히 무대에 선다.

골프장 입구를 지날 때면 이상할 만큼 익숙한 긴장감이 스친다. 마치 무대의 커튼이 천천히 올라가고, 나는 그 위로 밀려나듯 한 걸음 내디딘다. 일상의 나는 한발 뒤로 물러나고, ‘골퍼’라는 새로운 자아가 그 자리를 채운다.


무대 뒤에 선 배우처럼, 마음은 설레고 동시에 다소 경직된다. 오늘의 나는 어떤 역할을 살아가게 될까. 컨디션, 감정, 집중력 같은 것들이 하나씩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과연 어떤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그저 조용히 스쳐 가는 한 인물이 되어도 괜찮을까.


몸이 가볍고 마음이 고요한 날이면, 나는 무대 중심에 선 사람처럼 당당하다. 샷은 힘차고 자연스럽고, 실수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마음이 흐리고 조심스러운 날이면, 나는 무대 구석의 조연처럼 머뭇거린다. 실수 하나조차 의미를 품고, 그 조심스러움은 오히려 나를 더 많이 드러낸다.


가끔은 내 안의 또 다른 시선이 나를 바라본다. 마치 연출가처럼, 혹은 비평가처럼. 지금의 내가 너무 튀지는 않는지, 또는 지나치게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이 시선이야말로 골프장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시선이다.


티샷을 준비하는 그 짧은 시간, 나는 마치 한 줄의 대사를 읊기 직전인 배우처럼 선다. 공을 치는 순간은 말과 같고, 스윙은 마음의 표현이다. 잘 맞은 샷은 오랫동안 다듬은 문장처럼 또렷하게 나아가지만, 빗나간 샷은 내면의 균열이 드러나는 말실수처럼 당황스럽다. 이 작은 흔들림 하나에도 마음은 고요한 침묵에 빠져든다.


퍼팅 그린 위에서는 더 고요해진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고, 모두가 조용히 지켜본다. 이 짧은 거리 안에는 집중과 긴장, 그리고 어떤 각오 같은 것들이 스며 있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 몰입한다.


골프장 무대4.png


그런데 골프장은 자주 관객이 없는 무대가 된다. 누가 보지 않아도, 잘했든 못했든, 반응은 오직 내 안에서만 일어난다. 샷 하나, 퍼트 하나에도 마음은 반응한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안도하고, 다시 다짐하는 이 반복의 흐름은 그 자체로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진짜 연극일지도 모르겠다.


라운드를 마친 뒤 나는 조용히 묻는다. 오늘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가 맡았던 그 역할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연기였을까. 가면을 쓴 채 웃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스코어카드는 숫자에 불과하다. 내가 진짜로 궁금한 건 단 하나다.

나는 오늘, 얼마나 나답게 그 무대 위에 서 있었는가.

골프장은 종종 삶을 은유한다. 우리는 하루하루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주인공처럼, 때로는 조연처럼. 누군가의 부모로, 친구로, 동료로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어떤 배역 안에 있다.


그렇다면 골프장에서 마주한 나의 모습은, 어쩌면 내 삶의 진짜 단면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다시 묻는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나는 정말 내 역할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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