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개봉한 <파리, 13구>(감독 자크 오디아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흑백의 파리와 섹스였다. 시작부터 끝까지 흑백으로 펼쳐지는 스크린 속 파리에게서 화려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영화의 시작. 성냥개비 모양의 아파트처럼 각 잡힌 건축물이 규칙적으로 배치된 모습이 등장한다. 감정적으로 메마른 파리의 단면이다. 그렇게 파리 13구의 겉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그 도시 속 남녀 주인공들은 분주하게 사랑을 찾아 헤매고 섹스를 반복한다. 섹스 장면이 많이 나온다. 빛바랜 도시에서 펼쳐지는 진한 섹스라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낯선 두 조합은 스크린을 긴장하게 하며 동시에 요동치게 한다. 105분의 러닝 타임이 지났을 때쯤 관객은 각자 어떤 진한 색을 떠올린다.
에밀리(루시 장)는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온 남자 카미유(마키타 삼바)와 함께 살게 된다. 타인과 관계 맺는데 서툰 에밀리는 카미유가 맘에 들었지만 좋은 관계로 발전하진 않는다. 카미유는 스트레스를 섹스로 푸는 스타일이다. 대학생 노라(노에미 메를랑)는 포르노 배우 앰버 스위트(제니 베스)를 닮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또래들의 놀림감이 된다. 그러던 노라는 카미유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어딘가 해소되지 않는 느낌이다. 노라는 앰버의 유로 채팅 사이트에 접속해 말을 건다.
네 주인공은 자석처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달콤한 사랑은 짧고 외로움과 투덜거림은 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롭지 않다. 어느 순간 강렬한 빛으로 울렁거리기 때문이다. 이 넷은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마음이 가는 데로 움직이고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상대를 있는 힘껏 헐뜯기도 했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도 했다. 아지랑이처럼 정리되지 않은 여러 감정의 선들이 막 피어오른다. 그 선들은 다정한 종착지를 향해 조금씩 내닫는다. 그때쯤 알게 된다. 우리의 파리는 여전히 빛바래지 않았고 실제로는 여러 빛깔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그곳의 젊은이들은 생기 있게 살아간다.
이 영화가 좋았다. 늘 조심스러워하는 나에 비해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듯 성숙해 보여서다.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직선으로 내리꽂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래 본적이 사실 거의 없다. 늘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조심스러웠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도 그랬다. 언제나 나를 적당히 드러내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다는 건 상대를 배려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해소되지 못한 찜찜함이 남는 일이기도 했다. 때로는 관계가 틀어질 지경이 되어도 에밀리나 카미유처럼 속 시원하게 내뱉지 못했다. 그래서 이 지독하고 때로는 배려가 전혀 없는 이 관계들이 참 반듯하게 보였다. 멋진 주인공들의 멋진 부딪힘으로 기억될, 그런 영화였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