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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수 Jul 20. 2022

그저 그런 기분

여행 계획만큼은 철저하게 세우는 편이다. 아침, 점심, 저녁은 어디서 먹을지 미리 찾아서 리스트를 짠다. 볼거리도 찾아놓고 시간과 거리, 동선을 대통령 경호 급으로 계산해둔다. 여행지는 언제나 낯서니까.


한 해의 마지막 사흘과 새해 첫날을 제주에서 머문다는 낭만적 기분을 머금고 있었다.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끌고 전복게우비빔밥과 굴튀김을 파는 식당에 도착했을 때 긴장이 풀리고 비로소 여행의 느낌이 났다. 어둑어둑해진 여행지에서의 첫 식사는 따스했고 속은 든든했다. 호텔에 가서 씻고 맥주 한잔만 하면 완벽한 제주의 첫날이 되는 것이었다.


그 여행의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호텔을 한 블록 남겨두었을 때 골목길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내려왔다. 나는 비켜줄 생각으로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렸는데 갑자기 지이이익 소리가 났다. 어딘가 긁히는 소리였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심장이 벌렁거려 확인할 생각을 못했다. 대신 얼른 호텔로 차를 몰았고 도착해서야 알았다. 오른쪽 범퍼와 휠이 온통 긁혀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보상비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적어도 몇 십만 원을 물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날 밤 맥주를 마셨지만 여행의 기분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을 왔으니까 다음 날 다시 움직였다. 제주에 사는 친구와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갔다. 차를 1시간쯤 몰아 김창열미술관에 가 물방울 그림 전시도 보았다.


기운이 다시 차오르고 있던 찰나 이번에는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내비게이션을 잘못 봐 한 차선 밖에, 그것도 비포장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겨우 차를 돌렸을 때 해는 지고 있었고 스마트폰 배터리는 거의 다 떨어져 있었다. 차에 달린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간신히 숙소로 돌아왔다. 피로가 몰려왔고 반납하는 날까지 더 이상 운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다음 날, 바다가 더 잘 보이는 카페에 가 커피를 마시며 <작은 아씨들>을 읽었다. 커피는 달콤했고 네 자매의 이야기는 따뜻했다. 나는 그저 그랬다. 밤에 호텔 방에서 영화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새해를 맞았다. 그러니까 여전히 제주를 떠올리면 그저 그렇다. 이것도 여행의 묘미라고 말한다면 사실 좀 억울하다.


나의 목표는 이른 시일 내 제주에 다시 가는 것이다. 초보운전 딱지를 떼고 다시 차를 빌릴 거다. 그날 저녁에는 기분 좋게 맥주 한잔하고 말이야. 그러면 그 여행의 기분도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차 긁기 전에 먹은 전복게우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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