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만큼은 철저하게 세우는 편이다. 아침, 점심, 저녁은 어디서 먹을지 미리 찾아서 리스트를 짠다. 볼거리도 찾아놓고 시간과 거리, 동선을 대통령 경호 급으로 계산해둔다. 여행지는 언제나 낯서니까.
한 해의 마지막 사흘과 새해 첫날을 제주에서 머문다는 낭만적 기분을 머금고 있었다.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끌고 전복게우비빔밥과 굴튀김을 파는 식당에 도착했을 때 긴장이 풀리고 비로소 여행의 느낌이 났다. 어둑어둑해진 여행지에서의 첫 식사는 따스했고 속은 든든했다. 호텔에 가서 씻고 맥주 한잔만 하면 완벽한 제주의 첫날이 되는 것이었다.
그 여행의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호텔을 한 블록 남겨두었을 때 골목길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내려왔다. 나는 비켜줄 생각으로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렸는데 갑자기 지이이익 소리가 났다. 어딘가 긁히는 소리였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심장이 벌렁거려 확인할 생각을 못했다. 대신 얼른 호텔로 차를 몰았고 도착해서야 알았다. 오른쪽 범퍼와 휠이 온통 긁혀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보상비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적어도 몇 십만 원을 물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날 밤 맥주를 마셨지만 여행의 기분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을 왔으니까 다음 날 다시 움직였다. 제주에 사는 친구와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갔다. 차를 1시간쯤 몰아 김창열미술관에 가 물방울 그림 전시도 보았다.
기운이 다시 차오르고 있던 찰나 이번에는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내비게이션을 잘못 봐 한 차선 밖에, 그것도 비포장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겨우 차를 돌렸을 때 해는 지고 있었고 스마트폰 배터리는 거의 다 떨어져 있었다. 차에 달린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간신히 숙소로 돌아왔다. 피로가 몰려왔고 반납하는 날까지 더 이상 운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다음 날, 바다가 더 잘 보이는 카페에 가 커피를 마시며 <작은 아씨들>을 읽었다. 커피는 달콤했고 네 자매의 이야기는 따뜻했다. 나는 그저 그랬다. 밤에 호텔 방에서 영화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새해를 맞았다. 그러니까 여전히 제주를 떠올리면 그저 그렇다. 이것도 여행의 묘미라고 말한다면 사실 좀 억울하다.
나의 목표는 이른 시일 내 제주에 다시 가는 것이다. 초보운전 딱지를 떼고 다시 차를 빌릴 거다. 그날 저녁에는 기분 좋게 맥주 한잔하고 말이야. 그러면 그 여행의 기분도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