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영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요?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박화영이라는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해주고 싶어요. 박화영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도 좀 받고 살았으면 좋겠고 자신을 어루만질 줄 알았으면 좋겠어요."
올해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 '박화영'(감독 이환)이다. 끝없는 담배 연기가 스크린을 감싸고 욕설이 난무한다. 그 중심에는 가출 청소년 '팸'(가출청소년 무리)의 엄마 박화영을 맡은 김가희가 있다. 한국에는 없었던 '전대미문의 캐릭터'라는 평가를 받아서일까. 김가희는 올해 독립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신인이었다.
그러나 12월 24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서 만난 김가희의 모습에서 박화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나온 밝은 인상의 청춘이었다. 영화의 중요 대사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는 대사를 듣고 나서야 박화영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제가 박화영이랑 닮은 부분이 있어서 오디션에서 뽑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욕을 실제로 잘 못하고 사람들 눈치를 보는 부분이 닮은 것 같아요." 김가희에게 '박화영'은 특별하다. 단편 영화 '점프샷'(2012년), '집'(2013년), '처녀비행'(2017년) 등에서 차곡차곡 연기를 쌓고 '수상한 그녀'(2014년)에서 단역, '꿈의 제인'(2016년)에서 조연으로 나서고 난 뒤 맡은 첫 장편 '원톱' 영화다. 김가희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게 된 계기가 됐다. 올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신인상, 대한민국 베스트 스타상 독립영화 스타상을 받으면서 바쁜 연말을 보냈다.
"저도 이런 캐릭터를 할 줄 몰랐어요. 오디션을 보다 보니 캐릭터에 대한 감독님의 열정에 매료된 것 같아요. 박화영이 겉으로만 보면 욕만 하는 것 같지만 파고들어 가서 보니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배우로서 표현을 잘해야 한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박화영을 하게 돼 영광이었습니다."
ⓒ여성신문
'집'에서 이환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김가희는 '박화영'을 위해 5번이나 오디션을 봤다. 2016년 여름에 시작한 오디션은 그해 겨울이 돼서야 끝날 수 있었다. 오디션 현장에서 주어진 쪽 대본을 읽고 나면 이환 감독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 조언해줬다. 그러면서 스스로 박화영이라는 캐릭터를 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줬다. "영화가 굉장히 보편적이지 않은 내용이에요. 다른 영화에도 이런 캐릭터가 없어요. 굉장히 세 보이면서도 굉장히 약하고, 마음이 여리면서도 웃는 캐릭터죠"
박화영이라는 캐릭터가 연기하기에 쉬운 역은 아니었다. 음악도 하나 없는 영화에 제목마저 박화영이다. 주인공인 박화영과 그를 연기하는 김가희에게 모든 게 집중돼 있다. 김가희는 박화영을 연기하기 위해 15kg을 찌웠다. 감독의 주문은 5kg였다. 그러나 턱살이 붙지 않아 계속 찌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전대미문의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그는 청소년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와 영화 '케빈을 위하여'(감독 린 램지)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참고했다고 한다. 특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아이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늦게 깨달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과장된 연기 없이 담담하게 영화가 전개되는데 그걸 보면서 감정이 요란 쳤다. 열연하지 않는데도 매력적이었어요. 배우가 눈물을 쏟아내지 않아도 어떻게 관객을 울리는지 알 수 있었어요."
'박화영'의 박화영은 통통한 체격에 욕을 마구 지껄이고 담배를 끊임없이 물어댄다. 그런데 알고 보면 속은 여리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라면을 끓이고 자기 집을 그냥 내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 친구들은 등을 돌린다. 그런데도 그들을 향해 불평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소녀가 박화영이다. 영화는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박화영이라는 캐릭터에 집중한다. 어렴풋이 보이는 불행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그는 때로는 답답하게, 외롭게, 또 슬프게 보인다.
"저도 고구마(답답하다는 표현)를 싫어해요(웃음). 그런데 영화가 답답하면 관객들이 중간에 나갈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가지 말라고 기도했어요. 다행히 감독님이 티켓을 산 관객은 안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감독님이 '이건 극장 영화다. 공간에서 갇혀서 보는 영화다'라고 하셨어요."
ⓒ리틀빅픽처스
김가희는 시종일관 어둡게 전개되는 영화에서 감정에 복받친 순간도 있었다고 한다. 모텔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친구 은미정을 다독거리며 보내는 장면에서다. "울면 안 되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쿨' 할 수 있겠어요. 눈물이 많이 나서 엔지(NG)가 많이 났었어요. 영화 찍기 전 전체 리딩 때도 대사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박화영'은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5762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 첫날 16개의 스크린으로 시작할 정도로 개봉 횟수가 적었다. 독립영화로 홍보에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주연 배우로서는 상당히 아쉬울 터다. "올해 폭염에도 관객과의 대화(GV)를 했지만 홍보가 잘 안 됐어요. 그래도 관객들이 잘 봐주셔서 뿌듯했어요. 막판에 관객들이 몰려서 두 달 더 연장되기도 했어요. 저에게는 큰 숫자인 거 같아요. 저에게는 배우로서 도전과 싸움이기도 했는데 관객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김가희 배우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김가희가 배우의 꿈을 가지기 시작한 건 명신여고 3학년이었다. 좋아하는 분야로 대학교에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영화학과 진학을 희망했다. 하지만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20살이 된 김가희는 극단과 연극 동아리를 찾아다니면서 조금씩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기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21살 때까지 인천 지역 극단에서 연극에 출연했다. 프랑스 소설가 쥘 르나르의 '홍당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홍당무' 역을 맡기도 했다. 두세 달 정도 연습하고 공연 장소를 빌려 무료 공연을 했다. 김가희 표현으로는 '연극 버스킹'이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영화 정보 사이트 '필름메이커스'에 들어가 오디션 정보를 살펴보는 게 규칙적인 일 중 하나였다. 그러다 잠시 '외도'를 하기도 했다. 공연 기획으로 일자리를 알아보다 23살부터 약 2년간 수학학원에서 초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다시 배우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 건 한 지인이 대학로에서 연극이 있다는 소식을 받고 나서다. 수학 강사를 그만두고 2015년 연극 '세.아.이'와 '펜션에서 1박 2일'에 출연하면서 다시 배우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운 건 영화 '집'을 통해 이환 감독을 만나면서다. 여러 조언을 받으면서 김가희는 성장할 수 있었다.
"이환 감독님은 저에게 제2의 아버지세요. 저를 탄생시켜 주었으니까요. 연기를 하고 싶어도 멘토도 없었고 응원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감독님 덕분에 연기에 대해 직접 물어보고 대답도 들을 수 있었어요. 믿을 수 있는 멘토가 생겼다는 게 좋았어요. 감독님에게 저를 뭘 믿고 도박을 걸었냐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감독님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오디션에 계속 떨어지면 자존감도 떨어지는데, 배우는 자신을 믿으면서 하는 건데요. 누군가가 나를 믿어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후에는 계속 더 도전하게 되더라고요."
김가희는 '집' 촬영 이후 얼마 뒤 이환 감독이 장편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첫 장편으로 누가 주인공이 될까 봐 궁금증이 생겼다. 주인공은 바로 본인이었다.
올해 한국 영화계는 여성들의 활약이 거셌다. 김태리('리틀 포레스트'), 김다미('마녀'), 전종서('버닝') 등 젊은 배우들이 주목받았다. '미쓰백' 한지민을 포함해 현재 개봉 중인 '국가 부도의 날' 김혜수, '도어락' 공효진 등 여성 캐릭터가 다양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인배우의 눈에도 이런 환경의 변화는 반갑다. "예전에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도 왜 여성 캐릭터가 많지 않은지 궁금했어요. 올해부터는 많이 나온 거 같아서 벅차기도 해요."
김가희는 내년에도 스크린에서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뛴다. 어쩌다보니 어두운 역할만 많이 했다는 김가희. "다음에는 밝은 재미난 작품도 해보고 싶어요. 관객분들의 큰 관심에 부응하는 작품을 만나서 다른 캐릭터의 모습으로 관객을 찾아뵙는 게 제일 큰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