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가족'이었다. 시나리오의 시작은 블랙코미디였다. 하지만 쓰다 보니 장편 영화를 위해서 관습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어렸을 때 할머니랑 살고 다세대 주택에서 다른 집 아이들과 어울렸을 때의 감정 등을 하나씩 시나리오에 녹였다. 그렇게 어린 두 남매와 어른 두 남매,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다섯 명이 한 집에서 여름을 보내는 잔잔한 가족 이야기가 탄생했다. <남매의 여름밤>을 연출한 윤단비(30) 감독의 이야기다.
20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최근 만난 윤 감독은 "한국 영화에는 거시적으로 사회구조에 접근하는 방식이 있는데 저는 스스로 미시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중간층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제가 보고 자랐던 사람들이다. 친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감정의 곡선이 담겨 있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아빠 병기(양흥주)와 두 남매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가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지 영묵(김상동)의 집으로 이사 오면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남매의 고모이자 병기의 동생인 미정(박현영)도 이곳에 합세한다. 서먹했던 할아버지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남자 친구나 외모에 대해 고민하는 사춘기 소녀 옥주의 시선이 중심이다. 하지만 옥주와 동주의 '작은 남매'의 시끌벅적한 일상과 할아버지를 두고 걱정하는 병기와 미정 '어른 남매'의 현실적인 고민도 두루 담겼다.
"관객들이 영화를 잘 간직해주면 좋겠다"
▲ <남매의 여름밤>은 다섯 명의 가족이 한 집에 살면서 겪는 일상, 그리고 그 속에서 겪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뤘다. ⓒ 그린나래미디어
윤 감독은 "어린 남매와 성인 남매의 대비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할아버지는 가족들이 모이게 하는 중심인물이고 가족의 불편한 감정을 만드는 인물이다. 아이들에게는 자상한데 어른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존재다. 할아버지에 대한 남매의 다른 시선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어떻게 관객이 영화를 기억해주면 좋겠냐는 질문에 윤 감독은 쉽게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잘 간직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객이 영화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휘발돼 버리는 영화는 만들지 말자'가 목표였어요. 영화가 좋든 좋지 않든 계속 이야기되고 이미지 장면을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문득문득 떠올려주시면 좋겠어요."
그는 옥주가 가족과 일상을 나누면서 천천히 성장해나가는 것처럼 관객들도 응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 감독은 "학창 시절에 아버지가 오토바이로 등교시켜 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부끄러웠다고 하더라"며 "예전에는 구질구질해 보이고 부끄러워 보이는 흠결들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고 했다. 이어 "'나도 이런 시기를 겪었지만 괜찮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두 달간 돌아다니면서 찾은 인천의 한 양옥집의 거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바꾸지 않았다. 할아버지 방 앞에 달마대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거나 평범한 집의 살림살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 있는 중문도 영화에 반영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중문은 영화 안에서 관계의 연결과 단절을 뜻한다.
;남매의 여름밤;을 연출한 윤단비 감독. ⓒ 오누필름
양옥집을 배경으로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나 한 장면에서 잠깐 머물다가 조용히 그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연출 방식도 눈에 띈다.
"관객들 각자의 기억이나 경험을 소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여지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장면과 장면 사이에) 여백이 있어야 하거든요. 여백의 길이를 많이 고민했어요."
영화 연출에 막연한 꿈이 있었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쯤 연극영화학과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영화를 보면서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많이 덕분이었다. 20대 초반에는 <남쪽으로 튀어라>(2012) 등에서 데이터 매니저(촬영데이터 관리)를 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현장을 돌아다니다가 김기현 촬영감독을 알게 됐고 둘은 제작사를 차리고 이번 영화를 함께 제작했다.
차기작으로는 아직 구체적인 건 없다고 했다. 그는 "확장된 것들을 해보고 싶고 거기서 계속 뭔가를 찾아서 가보고 싶다. 색다른 시도를 하는 감독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 문제에 천착하면 또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며 가족 소재 영화에 대한 여지도 남겨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