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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수 Apr 23. 2020

어떤 여름날의 푸른 풍경

[리뷰]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한 장면. ⓒ디오시네마


여름날의 어떤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보다 많이 어렸을 때다. 해가 질 때쯤 샤워를 하고 몸을 말린 뒤 밖에 나갔을 때 펼쳐지던 공기. 한낮의 열기가 식어갈 때, 때를 맞춰 불어온 시원한 바람을 맞고는 했다. 너무 덥지도 습하지 않았다. 주황빛 농도도 적당히 훈훈했다. 이때의 풍경은 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까. 지금보다 때가 덜 묻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젠 그렇게 만끽할 여유가 없어진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여름은 참 덥기만 했다.

  
16일 개봉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감독 미야케 쇼)는 또 다른 색의 여름으로 기억될 영화다. '나는 이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9월이 돼도, 10월이 돼도. 다음 계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나(에모토 타스쿠)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정처 없이 하코다테의 밤거리를 걷던 나는 "에?"라며 잠시 가던 길을 멈춘다. 같은 서점의 아르바이트생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가 옆을 지나가면서 나의 왼쪽 팔꿈치를 살짝 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1, 2 ,3…그런 식으로 여자를 기다리는 건 처음이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니까 120을 셀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120에 도달할 쯤, 사치코가 나타난다. "다행이다. 마음이 통했네." 여름밤의 두 사람의 만남은 연애로 이어진다. 나의 룸메이트 시즈오(소메타니 쇼타)까지 더해 셋은 함께 여름을 보낸다.
  
유난히 푸른빛이 맴도는 영화다. 푸른색을 띤 장면들이 자주 나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웃음이 넘치는 세 주인공의 얼굴과 몸짓에서 푸른빛이 돌기 때문이다. 그건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자유와 젊음의 에너지일 것이다. 노래에 몸을 맡기고 웃고 떠들다 술기운에 지쳐 잠들고, 다음 날 일어나 미소 짓는 일본의 세 남녀. 이런 게 청춘이었던가.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길을 여러 번 건넌다. 이렇게 영화는 자유로우면서 때로는 거침없이, 때로는 불안정한 청춘의 한 계절을 수채화처럼 담아냈다. 오늘 이 순간만은 온전하게 만끽하고 싶은 이들의 말과 행동, 생각 그 어떤 것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한 장면. ⓒ 디오시네마


남녀가 한데 섞인 관계란 늘 그렇듯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세 사람 사이에도 아슬아슬한 기운이 감지되기도 한다. 마치 한 덩어리가 떼어져 다른 곳에 붙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셋은 건조하면서도 세련되게 그 순간을 넘긴다. 느슨해졌던 끈은 팽팽해지고 106분의 시간 동안 셋은 한 덩어리를 유지한다. 언제부터인가 청춘은 위로와 응원의 대상이었다. 청춘을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하면서도 선명하게 그려낸 작품은 오랜만이다.


여름의 이미지가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청춘과 젊음의 시간은 마치 한순간의 꿈같기도 하다. 나, 사치코와 떨어져 있던 시즈오는 함께 있었던 냄새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치코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젊음이란 없어져 버리는 걸까."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영화. 청춘과 젊음에 대해 간결하면서 매끄러운 답변.


그럼에도 젊음과 청춘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9월이 돼도, 10월이 돼도. 다음 계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는 나의 목소리처럼. 하지만 우리는 그 시절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또 소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푸른빛을 뿜던 시기가 있었다고. 봄에 미리 맛보는 한 여름날의 푸른빛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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