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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수 Dec 31. 2020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리뷰] 넷플릭스 일본영화 <마더>(2020)


며칠 전이었다. 영상통화로 친한 친구의 두 살짜리 조카가 밥 먹는 모습을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겨우 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더 큰 남자아이였다. 이 작은 아이가 해맑은 얼굴로 밥을 먹어도 밥을 흘려도 그 자체로 귀여움이었다. 그러다가 눈이라도 한 번 마주치면 내 얼굴도 아이처럼 해사해졌다. 아이들은 그 자체가 에너지이고 행복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더 좋은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더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딱히 내가 세상을 바꿀 정도로 큰 위치에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끔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세상은 아이들이 살기에 정말 좋을까? 코로나바이러스를 제외하더라도 근래 뉴스를 보면 아무래도 아이들에 대한 희망보다 불안과 걱정이 앞서게 된다. 가장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집에서 누군가의 자식들은 그 누군가에게 맞기도 하며 묶이기도 하며 어딘가에 갇히기도 했다. 아이와 부모가 등장하는 뉴스에 ‘캐리어’나 ‘쇠사슬’이라는 단어가 왜 나와야 할까. 포털사이트에 뜬 뉴스 제목만 봐도 섬뜩했다. 차마 기사 본문을 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다시 뉴스를 떠올리게 된 건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마더>(2020)를 보면서다. 금세 내 마음은 얼어붙어버렸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싱글맘이자 직업이 없는 아키코(나가사와 마사미)는 아들인 초등학생 슈헤이를 데리고 부모님의 집에 가서 돈을 달라고 생떼를 부린다. 부모님과 여동생은 아키코를 회피한다. 여동생에게 갚지 않은 돈이 20만 엔(약 200만 원). 사정해도 말이 먹히지 않자 아키코는 물컵을 던져 깨뜨린다.



그 길로 나와 오락실에서 파칭코를 하던 아키코 일행은 료(아베 사다오)를 만난다. 둘은 이내 취한 채 슈헤이와 아키코의 집으로 향한다. 청소도, 정리도 안 돼 있는 난장판의 집. 아키코가 슈헤이에게 소리친다. “슈헤이, 물 좀 끓여” (침묵) “야! 물 끓이라고 하잖아” “물 못 끓여, 컵라면도 없어” “진짜? 가서 사 와. 뜨거운 물 넣어 오면 되잖아. 료도 먹을래?” 그리고 료를 껴아키코. 잠시 뒤 터벅터벅 컵라면 두 개에 물을 넣어 들고 오는 슈헤이. 여기까지가 영화 시작 10분이 채 되지 않는다.


관객의 실낱같은 희망과 기대에 절대 응답하지 않는 영화다. 아키코가 왜 이런 행동들을 하는지 과거의 맥락을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는 마구 내달린다. 엄마는 좀 정신을 차릴까? 아이는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영화는 냉혹한 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엄마는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 남자를 유혹해 간신히 생명의 끈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아이에 대한 집착은 강하다. 아이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 이 무시무시한 상황은 반복된다. 아키코 모자(母子)는 집에서, 러브호텔로, 텐트로, 길거리로 내팽개쳐진다. 바닥에서 더 깊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슈헤이는 엄마의 고통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는 결국 엄마를 따른다. 이렇게 자기 손해인 삶을 그는 또 선택하고야 마는 거다. 처음에 나는 슈헤이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버거웠다. 아키코가 엄마라는 이유로? 아니면 엄마 없이 살 세상이 두려워서? 그저 슈헤이의 선택이 안타까울 뿐이었는데 그의 행동은 나중에 이해가 조금 되었다. 더 나빠질 게 없는 벼랑 끝의 현실에서 무얼 선택해도 사실상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이유 중에 하나였다. 분명 슈헤이의 어떤 선택은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엄마를 택했다.



난 이런 아픈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나은 삶을 기대하고 전진해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마더>. 물음표가 생겼다. 이 영화에서는 누가 엄마인가? 누가 어른인가?


어른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나와 상대를 동시에 돌보면서 애틋하게 여기고 약자에게 마음을 전하며 인생의 고난이 와도 휩쓸리지 않고 단단하게 버텨나가고 누군가의 삶에 기쁨을 주는 역할. 이게 진짜 어른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꼭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자식에게는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제대로 먹여줄 수 있는 사람. 이게 어른다.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 영화의 초반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언덕길을 올라오던 슈헤이와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던 아키코가 만나는 장면이다. 슈헤이는 왼쪽 무릎을 다쳤다. 피가 흐르는데 아키코는 살짝 웃으면서 그곳을 혀로 한 번 핥는다. 무슨 좀비도 아니고 왜 그러나 싶었다. 이 괴상한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아이의 상처를 돌보고 걱정하는 게 아니라 웃으면서 그 상황을 지켜보는 아키코. 앞으로 숱하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아키코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압축적인 장면이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대부분은 기적 속에 산다. 좋은 엄마를 만나고 좋은 아빠를 만나고 좋은 가족을 만난다는  자체가 커다란 기적이다. 기적을 만나지 못하면 세상에 태어난 누군가의 삶은 매 순간 위험하고 순탄하지 못하다. 분명 <마더>는 아픈 영화다. 하지만 이렇게 심장이 멎을 정도로 시려야 저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기억한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본다. 영화 속 이야기가 정말 영화 속에서만 그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아키코 같은 어른은 필요 없다. 아키코 같은 어른은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선 안 된다. 주인공은 아이가 되어야 한다. 영화도 인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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