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BIRD, 201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이디 버드>를 두 번이나 봤다. 처음은 고등학교 친구와 봤는데, 그날따라 비가 오고 일정이 꼬여서 저녁도 못 먹은 채로 영화관에 뛰어들어갔다. 딱 들어간 순간에 광고가 끝나고 상영관이 어두워졌다. 붉은 머리를 한 주인공은 외견이나 문화적 차이와 상관없이, 1년 전의 친구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나는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린 적이 없음에도 공감이 갔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스쳐간 풍경은 비 온 뒤에 보이던 고향 같아서 아름다웠다.
주인공 크리스틴은 자기를 ‘LADY BIRD’라고 불러달라고 주장한다. 첫 장면에서 그녀는 가톨릭 고등학교에 가는 게 싫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린다. 그녀의 어머니는 정신의학과의 간호원이고 아버지는 회사에서 잘렸다. 다른 학생의 부모님보다 못한 자동차, 아직도 아르바이트 중인 배다른 오빠와 그 여자 친구와 살면서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부끄러워한다. 첫 애인에게 ‘철도의 잘못된 쪽’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일부러 학교 근처에서 내려 걸어간다. 이런 크리스틴과 좋은 대학은 학비가 너무 비싸다고 지원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갈등은 당연한 일이다.
<레이디 버드>는 여성 청소년을 다룬 이야기다. 크리스틴의 감정은 이리저리 튀고 변덕스럽지만, 청소년기를 거친 사람이라면 그녀의 감정 변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어머니와만 갈등하지는 않는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첫 번째 애인은 사실 동성애자였고, 그 이후에 친해진 부자 친구와 애인은 겉보기뿐인 관계라는 걸 깨닫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무엇 하나 빠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청소년기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니까 영화에서 나온 모든 게 섞여서 크리스틴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심이 되는 갈등은 역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나온다. 이 갈등은 작품의 시작부터 결말까지 이어진다. 다른 인물들은 전부 크리스틴의 시점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크리스틴의 어머니만큼은 그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입시할 때의 기억과 <케빈에 대하여>가 생각났다. 나는 부모님이 이상적일 수 없다는 말을 심정적으로 이해한 지 얼마 안 되었다. 그 전에는 왜 더 노력하지 못하는지 못마땅했고, 서로 맞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답답했다. 내 이상의 최저는 노력과 소통을 통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인데, 그 최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게 너무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한 시간 거리의 회사에 다니시면서 집안일을 몽땅 하고 계신다. 왜 부모님은 자기 계발은 하나도 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생각해보면 노후를 위해 저축하고, 언니와 내 용돈을 챙겨주고 나면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걸 왜 하나도 설명해주지 않을까 못마땅했지만 곧 그럴 체력도 기운도 남지 않으셨다는 걸 깨달았다. 부모님은 분명히 어린 나한테는 대단한 존재였다. 아마 앞으로도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들일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더는 거인이 아니다. 부모님은 모든 걸 경험하신 게 아니고, 세상에는 부모님도 나만큼이나 모르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크리스틴과 그녀의 어머니 매리언 역시 마찬가지다. 매리언은 다소 강압적인 성격을 가지고 크리스틴은 자기 생각뿐이다. 크리스틴이 첫 키스를 하고 돌아온 날에 매리언은 화를 내며 나무란다. 억울한 크리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옷을 정리 안 하고 잔 적이 하룻밤도 없었어? 엄마의 엄마가 화내고 나쁜 말만 할 때 억울한 적 없었어?” 매리언은 이렇게 대답하고 문을 쾅 닫아버린다. “우리 어머니는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 환자였어.” 이어지는 영화를 보면 매리언은 노크도 하지 않고, 좋은 대학을 학비 때문에 지원도 하지 말라고 하는 어머니이다. 기어이 지원한 딸에게 화가 나 뉴욕으로 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날에도 주차비가 비싸다며 배웅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크리스틴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기 전에 매일 밤 딸에게 보낼 화해의 편지를 썼고, 그녀는 마지막 날에도 결국 차를 돌려 공항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비행기는 떠난 뒤였다. 크리스틴 역시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가 입을 다물자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고 말하고, 엔딩에서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끝낸다. 부모가 지은 이름을 따르는 행동은 신을 믿는 행동이랑 똑같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어머니와 청소년기 크리스틴의 갈등은 예고편에서 나온 장면으로 일축할 수 있다.
‘나는 네가 언제나 가장 좋은 모습이길 바란다.’
‘이게 내 가장 좋은 모습이면?’
어머니는 크리스틴이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모습이기를 기대했고 크리스틴은 변덕적인 자신을 어머니가 나무라지 않기를 기대했다. 크리스틴은 좋은 학교에 보내주려 하는 부모의 모습, 딸이 좋아할 때는 같이 기뻐하는 부모의 모습,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진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기대했다. 결국 양측 모두 서로 품고 있던 기대 때문에 갈등한 것이다. 상대에게 어떤 기대를 갖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영화에서 보이듯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품게 되는 기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앞서 <케빈에 대하여>가 생각났다고 했다. 모성애가 없는 어머니는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엄연히 실재한다. 대부분의 미디어에서는 모성애가 없는 어머니를 아동학대범으로 묘사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모성애가 없다는 사실이 학대의 행위로 바로 넘어가는지 의문이다. 모든 어머니들이 낳자마자 아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낳았지만 정을 붙일 수 없는, 그 사이의 시기에 ‘무조건 모성애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혼란스러움만 가중시킬 뿐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이 혼란스러움을 조명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초기에 내리사랑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영원히 아이에게 정을 붙일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미숙하고 혼란스럽고, 오래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노력했음에도 끝내 정을 못 붙일 수도 있다. 그게 학대의 행위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똑같이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건 엄연히 실재하는 현실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나는 <레이디 버드>도 이와 유사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케빈에 대하여>가 여성이 자식을 갖게 될 때의 혼란을 보여줬다면, <레이디 버드>는 청소년이 성인이 될 때의 혼란을 보여준다. 청소년기에 거짓말을 안 한 사람이 있을까? 선생님을 골탕 먹이고 친구와 부모님에게 상처를 하나도 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행동을 하고 후회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일들은 전부 바람직하지 않다. 후회할 짓이라면 왜 친구에게 거짓말을 칠까? 왜 부모님한테 미안하다고 할 거면서 결국 상처 주는 말을 할까?
아직 미숙한 청소년일 때,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고 사과하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찾아간다. 그렇게 삶을 가늠해간다. 나는 미성숙한 크리스틴이 좋았다. 새크라멘토가 질린다고 말했던 주제에 마지막에 새크라멘토의 거리가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크리스틴이 좋았다. 가톨릭 고등학교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던 주제에, 마지막에는 교회에서 성가대를 보는 크리스틴도 좋았다. 실수도 후회도 하는 크리스틴이 딱 그 나이다워서 좋았다. <레이디 버드>의 의의는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게 되는 혼란과 미숙함을 조명한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결말부는 크리스틴이 미숙한 경험 끝에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뉴욕으로 간 이후의 생활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사실 동성애자였던 첫사랑과 이름 붙인 별을 찾는 모습이나, 두 번째 애인과 만났을 때처럼 악수로 인사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과거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더는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와의 차이를 보인다.
나는 엔딩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가장 감명 깊게 다가온 건 새크라멘토의 거리 부분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고 싫어했던 새크라멘토가 아름답고 정겨웠다고 느낀다.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았으나 사실은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머니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에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옆으로 떠나는 모습은 새로운 출발이다. 가족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로또가 당첨된 것도 아니다. 집을 담보로 잡아 학비를 겨우 댔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걸 받아들인다. 이름을 받아들이는 게 그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시스 하>로 유명한 그랜타 거윅이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줄거리는 하나도 몰랐지만 친구에게 여성영화라고 소개받았다. 그래서 <서프러제트>나 예술영화의 인상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CGV 아트 하우스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고 왜 그랬는지 의문이다! 영화는 통통 튀는 코미디에 더 가까웠고 인물의 행동은 전혀 난해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아도 대중적인 수작인데, 왜 굳이 여성영화라고 분류되는지 궁금했다. 단지 주인공이 여자이고 소위 ‘대디 이슈’가 아니라 어머니와 갈등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영화라고 불리는 걸까? 그걸 굳이 여성영화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조금 아쉬웠다. 그런 이유로 영화에서 조명되는 여성 인물에 대해 논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독의 인터뷰를 조금이나마 찾아봤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에서 오는 수치심’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크리스틴은 자신의 정체성(새크라멘토와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희망하던 대학에 진학했다. 정체성은 조금씩 변화하지만, 우리는 결국 우리가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그저 청소년기를 재미있게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나 생각할수록 어려워지는 작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