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그을음을 끌어안고.

by 토독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를 알게 된 건 이번 학기 중에 수강했던 교양과목 덕분이다.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수업 스타일이나 강의 내용(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학점)을 좋아해서 발견하자마자 시간표에 넣었다. 정작 학기 중에는 꽤 바빠서 못 봤었는데, 마침 다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할 것도 없겠다 봐보았다. 생각보다 잔인한 편이다. 잔인한 장면에선 멈췄다가 일부러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서 보기도 했는데, 사실 영상이나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잔인했던 것 같다.


교수님이 설명하실 때, 이 영화가 오이디푸스의 변주라는 이야기라고 하셨으므로 사실 가장 큰 반전은 알고 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강렬했고, 너무 강렬해서 좀 버거웠다. 진짜 힘들었다는 의미는 아니고, 재밌긴 한데 잠깐만 쉬어가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사실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때, 이오카스테를 가엾게 보긴 했지만, 크게 이입하진 않았다. 그녀가 능동적으로 한 것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오카스테 역인 나왈 마르완에게 이입을 안 할 수가 없다. 니하드 역시 오이디푸스에서 부분적으로 차용한 것 같은 캐릭터인데, 끝날 때쯤에는 이입이 되고 말고를 떠나 니하드도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이디푸스 왕은 라이오스 왕의 살인 말고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잘못한 게 없었으나, 니하드는 잘못한 게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니하드와 오이디푸스의 환경이 같지 않다. 니하드는 오이디푸스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고,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으나. 어찌 됐든 내가 오이디푸스를 가엾게 생각하듯 니하드를 가여워할 수는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 영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세 인물에게서 나타난다. 사르완과 자난(혹은 시몽과 잔느), 니하드가 그 셋이다. 니하드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가져갔고, 사르완과 자난은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쫓아가는 것,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깨닫는 것을 가져갔다.


나는 분명히 위에서 나완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가장 감명 깊게 본 장면은 모두 시몽과 잔느가 나온 장면이었다. 첫 번째 부분은 자신들의 오빠가 아니라 자신들이 감옥에서 태어났다는 걸 깨달은 장면이었고, 두 번째는 사르완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자난이 깨달으면서 놀랐던 장면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봐서 솔직히 주변이 별로 조용하지 않았는데도, 자난이 놀라는 소리에는 정말로 공포와 경악이 담겨 있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는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적이 있지 않나? 똑같은 무언가를 보고 나는 전혀 무섭지 않았는데, 같이 본 친구가 비명을 지르면 같이 비명을 지르는 경우. 딱 그런 경우처럼 놀랐다. 이미 알고 있고 예정되어 있던 깨달음이었는데도, 심지어 너무 어렸을 때부터 알아서 심드렁하게 아는 내용이었는데도, 함께 놀라게 만드는 연기가 참 좋았던 것 같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말 자신의 일이 된다면 (이 세상에 그런 일은 픽션으로만 존재해야 하지만) 그런 경악을 겪게 되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봤다.


배경 나라가 어디인지 모르겠는데, 파키스탄인가 했는데 찾아보니 레바논이다. 어쨌든 강의 중에 들었던 대로 종교분쟁이 배경이었다. 강의 중에는 종교분쟁이 그저 배경일 뿐이라고 하셨지만, 나한테는 굉장히 크게 다가왔다. 나완이 아이라도 살리려고 내 딸이라고 했지만, 끝내 아이가 어머니에게 달려가는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만약에 나완과 니히드가 처음부터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까? 나완의. 편지에서 반복하여 나왔던 것이 생각난다. 함께 있는 것은 좋은 거 란다. 떨어지지 않아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 법이다. 진정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한 이해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과, 심각한 오해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마음속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과, 앞에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인지하지도 못한다는 것은 명백히 다른 일이다.


사실 넷플릭스에 에반게리온이 떠서 심심해서 다시 봤었는데, 그것과 견주어 보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어도 진정한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낙심하는 것과 떨어져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 무엇이 더 괴로울까? 영원히 인지하지 못한다면 모를까, 어느 순간 인지하게 된다면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봐도 그 괴로운 진실조차 모르는 것이 더 참담하다. 물론 떨어져 있는 우리가 함부로, 직접 마주하고 있는 당사자들의 참담한 정도 같은 것을 논하는 것은 오만이지만. 이건 픽션이니까.


니히드는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나왔을 뿐, 작중에서 그의 마음이 어떻게 곪아갔는지는 크게 묘사해주고 있지 않다. 물론 그것마저 묘사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그랬겠지만. 동시에 당연히 그래야 했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의 잘잘못 같은 것을 손에 꼽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겠으나, 그럼에도 누군가는 죄를 알아야 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며 스스로를 벌하는 것으로) 저항하는 인간의 한계와 위대함에 대해 그리고 있고, 이 작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오이디푸스에서 이오카스테로 초점이 옮겨가면서, 그 누구보다 운명의 희생양이었으나 끝내 자신의 아이이자 남편인 오이디푸스를 가엾게 여긴 그녀를 원작보다 잘 드러냈다.


실제로 그녀는 배경이 현대로 옮겨오면서, 누구보다 진취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랑을 자신의 손으로 선택하고, 학교에서 평화를 위한 운동을 하며, 아이를 찾기 위해 직접 위험한 현장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운명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과 맞물리면서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 사랑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고, 평화를 위한 신문사의 운동이 군인들에게 짓밟히는 걸 보고, 아이를 찾으려다가 진실을 깨닫고 테러리스트가 되어 수감된다. 그리고 결말을 바라보면 오이디푸스의 메시지가 그대로 들려오는 것 같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저항하는 인간 그 자체의 이오카스테가....... 이렇게 쓰니까 조금 오글거리는데, 아무튼 원작의 이오카스테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다 깨닫고 나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여기서 그만 멈추자고 하던 그녀를 생각해보자.


뭐, 너무 무겁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겁게 안 보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면서 수영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그게 내 삶에 가장 유의미한 감상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건 픽션이며, 심지어 답도 없는! 운명에 대해 다룬 픽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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