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ape of Water, 2017
*영화 자체는 영화관에서 몇달 전에 봤는데 이제야 올리네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의미가 큰 영화였다. 영화를 다양하게 보지 못한 편이기도 하지만, 독신 노인이 된 동성애자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주류 영화에서 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이야기에 소수자가 많이 등장한 이유는 단순히 소수자의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에서 아무 이유 없이 동성애자인 스파이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디어에서도 아무 이유 없이 나오는 게 맞기 때문이다.
분명 주인공이 사랑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소수자라는 건 멋졌다. 하지만 조금 외롭기도 했다.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엘라이저가 자신을 떳떳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점도 멋있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짐승만도 못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은 조금 찝찝했다. 사실 이건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다양한 소수자가 보고 싶다. 마땅한 일을 하는 떳떳한 사람으로서의 소수자와, 소수자라는 것에 괴로워하는 소수자와 그냥 덤덤하게 살아가는 소수자가 모두 나온다면 좋겠다. 세상 어느 곳에나 소수자는 존재하지만 그들의 모양은 모두 균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작품의 ‘사랑은 정해진 모양이 없다’는 주제와 통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다뤄진 사랑은 몇 개 되지 않고, 주가 되어 드러나는 소수자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상영시간이라는 제한 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제한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개별은 모두 다르고 형용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표현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대표 인물을 설정하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개별적인 다양성을 훼손하는 것 아닐까? 이 영화는 ‘형용할 수 없음’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는가? 그것이 성공 가능한 일인가?
물은 영화 내내 나올 뿐만 아니라,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중요 소재이다. 대체 이 영화에서 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지막 내레이션에서는 꽤 분명하다.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이는 엘라이자와 크리쳐가 물에서 포옹하는 엔딩 장면의 내레이션이다. 여기서 물은 사랑으로 해석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다. 그래서 한국의 부제가 ‘사랑의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관에서 처음 본 순간,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온 세상을 채우고 나를 휩싸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정의할 수 없고, 세상이 온통 한 사람으로 물드는 것이 사랑이다. 감독은 형태를 논할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동성애, 가부장적인 부부, 다른 생명체와의 사랑을. 분명히 조연들을 통해서 다양한 사랑의 감정을 보여준다. 육체로만 끌린 감정, 욕망에 가까운 감정, 수십 년을 살았지만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까지.
그러자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이 하나 있었다. 결말은 오히려 사랑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나? 사랑은 꼭 세상이 전부 그 사람으로 물들 정도로 강렬해야 사랑인가? 이 영화는 사랑은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나, 사랑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영화이다. 딱히 철학적인 고민이 필요없이 재미있는 영화라서 부담없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너무 많은 생각이 이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킬지도 모른다. 아, 진짜로 필요한 리뷰: 잔인한 장면이 있다! 잔인해서 청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