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서평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트로이목마로 유명한 트로이와 그리스의 십년 전쟁을 소재로 한 대서사시다.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파리스, 헥토르, 오디세우스 등 한 번쯤 들어본 영웅들이 총 동원된 전쟁은 영웅들의 이름값만 보면 지중해역사의 판도를 바꿀만한 규모였지만 대부분의 영웅이 죽었음에도 전쟁의 끝은 허무하게도 한 도시의 함락이외에는 아무런 결과를 남기지 않았다. 극적인 전투 따위는 없다. 구년간 지지부진했다. 또한 아킬레우스는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어이없게도 싸움의 ‘싸’도 모르는 파리스의 화살에 전사한다. 트로이 왕이 그리스가 놓고 간 트로이 목마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허망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덧없다고 치부한다면 삼천년이 지나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죽음을 도피하는 신과 죽음을 직면한 인간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잠시 책에서 벗어나 신화로 올라가보자. 사실 올림푸스의 주인, 제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디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테디스의 아들은 아비보다 훌륭할 것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예언이 무서워서 최고신은 테디스를 인간과 결혼시킨다. 올림푸스의 주인보다 뛰어나다면 세계의 지배자가 바뀌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자신이 아버지 우라노스보다 힘이 강해지자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처럼 자식도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그는 사랑보다 권력을 택했고, 죽음보다 연명을 직시했다. 강자는 언제나 약자에게 책임을 떠맡긴다. 테디스는 온갖 모습으로 변하며 인간과의 결혼을 피해다녔지만 절대 권력자의 결정에 반대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원치 않았지만 제우스의 의견을 반대했다가 영원한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리면 그의 결정은 법이었다. 이 둘이 낳은 자식이 바로 아킬레우스다.
운명은 모든 것이 맞물려 굴러가기 마련이다. 테디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의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분노하며 축하연에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 바친다’는 글귀가 새겨진 황금사과를 놓고 사라진다. 이 사과를 발견한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는 사과의 주인을 결정해달라고 제우스를 찾아가지만 그는 귀찮아하며 결정권을 목동이었던 파리스에게 넘긴다. 세 여신은 파라스에게 각각 권력, 지혜, 아름다운 부인을 제시하였고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제시한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준다. 그 여인이 바로 헬레네다. 파리스는 태생이 트로이의 왕자였으나 파리스가 트로이를 멸망시킨다는 신탁을 받은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에게 버려졌다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신탁을 다시 왕자로 복권한다.
파리스와 헬레네, 두 사람에게 배우자가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겠지만 두 사람은 모두 배우자가 있었다. 파리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아내를 버렸고 헬레네는 남편 메넬라오스가 외조부의 장례식에 참석한 틈을 타 파리스와 트로이로 도피한다. 이렇게 트로이와 그리스 10년 전쟁은 발발되었다. 제우스가 운명을 도피하고자 굴렸던 작은 돌맹이는 평화롭던 두 국가를 덮치는 거대한 암석이 되었다. 파리스와 헬레네를 연결해준 아프로디테는 트로이 편에 섰고 황금사과를 받지 못해 분노에 찬 헤라와 아테네는 그리스 편에 섰다. 그 외에 신들은 각자의 우호관계에 따라 편이 갈라졌다. 이제 이 전쟁은 인간만의 전쟁이 아니다. 인간과 신들의 전쟁이다.
이 전쟁에는 수많은 영웅이 참전했지만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있었으니 신들에게 최고의 영웅이라고 칭함받는 아킬레우스이다. 그에게도 신탁이 있었다. 이 신탁의 내용은 이러하다. “만일 네가 트로이아에 가면 엄청난 명예를 얻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겠지만 단명할 것이고, 가지 않는다면 오래는 살겠지만 아무런 명예도 얻지 못하리라.” 테디드가 받은 신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아킬레우스가 받은 신탁만큼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었다. 어머니 테디스는 자식의 죽을까 걱정되어 트로이전쟁이 시작되자 아들 아킬레우스를 여장시켜 숨겼지만 오디세우스에게 들켜 전쟁에 끌려간다. 이 전쟁은 진전없이 구년이 지난다. 그러던 어느 날 포로소유 문제를 두고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불화가 일어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여기서부터 서술한다. 아가멤논과의 갈등으로 환멸이 난 아킬레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그의 장비를 대신 입구 출전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자를 효율성과 목적가치로 따지는 현실은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킨다. 기술적인 지배체계에서 세계(존재)는 불안을 통해 존재자를 부른다. 불안을 인정한 존재자는 죽음을 직면하고, 세계(존재)에 대한 물음 끝에 불안은 세계(존재)를 향한 경이로 바뀐다. 세계(존재)를 인식한 존재자는 더 이상 현실에 지배되지 않고 스스로 세계를 찾아 떠난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킬레우스가 있어야 한다는 신탁을 듣고 전쟁에 불참하고 싶어 여장까지 한 아킬레우스를 찾아는 간 이유는 전쟁의 승리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구년간 아킬레우스는 원치 않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찾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듣게 된다.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지만 그에게 친구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그 울음을 들은 어머니 테디스는 찾아와 위로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그 아들을 두 번 다시 고향에서 맞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스에서는 엄청난 명예를 가진 사람들은 죽어서 별이 된다고 믿었던 것을 떠올린다면 아킬레우스는 드높은 천공의 별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현실이 범접치 못할 하늘에서 현실을 비웃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아킬레우스는 친구를 죽인 헥트로를 죽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여기서 끝난다. 그 후 파리스의 화살에 뒤끔치를 맞아 전사한다. 길고 긴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묘책인 목마를 의심없이 받아들인 트로이의 파멸로 끝난다.
자신의 길을 선택한 아킬레우스를 뒤로하고 다시 이야기의 시작점인 제우스를 떠올리자.
올림푸스의 신 제우스는 어떠했는가. 그에게는 신탁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온전한 자유를 누리던 그는 테디스가 받은 신탁에 제 발 저렸다. 그는 방관자인척 행세하지만 모든 사건의 씨앗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혹시 모를 죽음에서 도피하기 위해 사랑했던 테디스를 강제로 인간과 결혼시켰고, 세 여신의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아 파리스에게 결정을 미루었고,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 중립인 척 방관했다. 제우스는 현실에서 자유로웠지만 자유로운 존재자는 아니었다. 혹시 모를 죽음에 선택권을 잃었고, 나태해 선택권을 포기했고, 체면치레하고자 선택권을 유보했다. 그는 올림푸스의 최고신이란 이름과 달리 현실에 도구였다. 그것도 스스로 도구를 자처했다. 죽음을 직면한 인간은 세계를 경이한 존재가, 죽음을 도피한 신은 현실의 도구가 된 존재가 되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신화의 끝자락에서 현실에 갇힌 신들과 세계를 경이하는 인간을 보며 『일라이드』라는 그리스신화의 엔딩크레딧을 남겼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신화의 종막이다. 대부분의 영웅이 죽고 그들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오디세이아의 귀향이야기와 아이네이아스의 로마건설이야기만 전해진다. 그와 함께 신들도 기억저편으로 잊혀진다. 이제는 새로운 역사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모든 존재를 기억하지 않는다. 현실에 지배되는 존재는 여전히 잊혀지고 세계를 경이한 존재만이 기록되어진다.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고 싶은가. 그럼 죽음을 직면하고 세계를 경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