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체화된 라이프 스타일러
오늘 새벽에 설교가 있었다. 어제는 주일 설교, 청년 설교, 어린이부 교사월례회, 이후에 설교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 8시에 시작한 하루는 새벽 2시가 다되어서 끝 종을 쳤다. 요 며칠 갑작스러운 장례로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혹시 늦잠이라도 잘까봐 선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가운데 머리는 복잡해지고 마음은 차분해졌다. 일의 시간이 늘었기에 나의 시간이 줄었다.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중 유일한 휴일인 월요일 새벽부터 새벽 설교, 발인 예배, 하관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니 오후 12시였다. 그리고 잠시 김밥을 먹고 잠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4시. 하루가 끝나간다. 당시에는 힘들지만 하루 전체를 놓고 보면 크게 불만이 없다.
내 삶은 늘 고체화되어 작은 진동 외에 움직임이 없다. 타인과의 만남을 즐기지도 않고 카페에 와서 독서만으로도 만족한다. 밀린 집안일이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그것도 한 주간 조금씩 부지런 떨면 따라잡을 수 있다. 현재 내 삶을 구성하는 대부분은 ‘나’와 ‘나의 업무’에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해야지 앞으로 나는 더 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덜 지칠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글을 적고 보니 삶이 수동태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을 하고 싶다. 무엇이 이루고 싶다는 없다. 목표를 잃어버렸다기 보다 도달점을 정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삶을 오래 끌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삶이 짧기를 바랐고 무슨 직업에서 성취를 떠올리기 보다 그저 작고 소박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삶을 꿈꾸었다. 철없다고 여길 정도로 그 삶을 유지하는 방식을 생각치 않았다.
그렇게 떠돌며 산 지 5년 대한민국에서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의 5년은 인생의 전부라고 여겨진다. 그 시기를 놓치면 새로운 일을 할 수도 없고, 실력을 쌓을 수도 없고, 자리를 잡을 수 없다. 나는 그 시기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살았다. 그리고 돌아온 이곳에서 나는 급급하게 살아간다. 자유에 대한 형벌과 노력하지 않음에 대가로 받아들인다. 이 직업이란 울상과 무상이 허락되지 않는다. 웃상만이 허락된 공간에서 늘 웃는다. 입은 웃고 눈은 무상이다.
생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쓴 이 마음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생각을 멈추고 눈을 감고 쓴다. 잠시 마음의 소리를 밖으로 쏟아내는 이 시간을 통해 마음속 풍랑이 잠잠해지고 뒤집어질 것 같던 배는 고요해진다. 거센 파도는 촐싹거려지고 풍랑은 잔바람으로 바뀐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책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남의 삶을 들여다보며 고체화된 삶을 데웠다. 이렇게 데우다 보면 언젠가는 녹아서 액체가 될 테고 언제가는 기화되어서 또 새로운 영역으로 날 이끌기를 기대한다. 하루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