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면 어김없이 쉴 수 있다는 사실이 긴 하루를 견딘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 몸이 지쳐버린 날에도 이 시간만큼은 나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다. 늦은 밤 창밖으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며 가끔은 뜻밖에 찾아오는 고요가 마치 오래전 친구처럼 나를 달랜다.
시지프스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살아 있음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무거운 돌을 굴려도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주는 숨결 같은 것에.
봄이 오면 얻게 되는 사소한 기억들,
예컨대 벚꽃 잎 하나를 손등에 받아 보던 오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함께 마셨던 작은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살아 있음으로부터 오지 않았던가.
밤이 절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숨 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때 그래도 문득 달빛이 밤을 이긴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아무 일 없던 얼굴로 별들은 또다시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채 그 눈꺼풀 너머에서 은근한 빛을 버티어 낸다.
내일 또,
그 말이 이따금 마음 한 귀퉁이에 머물러 있다.
내일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이 벅차고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단한 몸을 뉘이고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따뜻한 숨소리에 두 손을 모은다.
시지프스에게도 어쩌면 희망은 주어져 있었을지 모른다.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견디며 알게 되는 고통을 우리는 하루하루 삼킨다.
만약 헤매지 않았다면 나는 달빛도 바람도 별빛도 든든하게 버티는 어둠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길들여지는 일조차 고맙게 여긴다. 새로운 낱말에 마음이 새로워지고 조금씩 자라고 있는 존재 가능성을 느끼며 마음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작은 꽃들이 피어난다.
의미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시지프스의 운명은 어쩌면 봐야 할 것들을 보게 하는 은총일지도 모른다. 영토 없는 왕과 싸우는 착한 아이처럼 나는 여전히 일상이 주는 신비 앞에 멈춰 선다. 또 그 신비를 가로막으려 드는 내 안의 나와 조용히 저항한다.
그 싸움은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안에서는 여전히 뜨겁다.
가끔은 생각한다.
우리가 의미 없는 세상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야말로 진짜 살아 있음의 증거가 아닐까.
오늘도 무거운 돌을 밀어 올리면서 나는 알게 된다.
세상이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아도 한 번 더 숨을 들이켜고 싶은 마음, 한 번 더 네 이름을 부르고 싶은 마음, 한 번 더 내일을 열어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나를 걷게 한다.
돌을 굴리고 길을 잃고 다시 몸을 뉘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숨을 쉰다.
달빛을 본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조금씩 길들여가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내일을 기다린다. 무거운 돌을 굴리듯 나는 오늘도 나를 밀어 올린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이름 없는 별빛 하나를 나만의 문장으로 건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