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 진짜를 찾아서.

어디 얼마나 잘 맞추는지 볼까.

by 랑시에르

이성과 무속, 그 경계에서 만난 위로

여름의 한복판이었다.

친분을 위해서라기보다, 어쩌면 내 내면의 지도를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고 싶어 점을 보기로 했다. 나는 소위 '모태신앙'이라 불리는 환경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청춘을 보냈다. 신학 서적들을 섭렵하며 조직신학과 성서비평의 날카로운 잣대로 신을 이해해왔다. 또한 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했고, 신화학, 종교학, 그리고 사회·문화·역사에 대해 오랫동안 독서를 이어왔다.


역설적이게도 신에 대한 관념이 이토록 열려 있었기에, 무당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예약을 마치고 점사비를 준비했다. 신당의 안내문에는 '예의를 갖춰달라'는 당부와 함께 "신당에 오실 때는 양말을 꼭 신고 오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는 점사비를 봉투에 담고, 그 사이에 얇은 책갈피를 하나 끼워 넣으며 예의를 갖췄다.


아파트라는 세속의 공간, 그 문턱에 뿌려진 소금

보통 무당들은 신당을 따로 두지 않고 가정집에 모시곤 한다. 내가 만난 무당 역시 평범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현관에 들어서기도 전, 문 앞에는 굵은 소금이 뿌려져 있었다. 여느 아파트 현관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출입구 양옆의 소금단지와 바닥의 소금은 이곳이 경계의 공간임을 암시했다. 부정한 기운의 침입을 막으려는 고색창연한 비방(秘方)이었다. 입구에는 대감을 위한 초와 상이 차려져 있었고, 보루째 쌓인 다양한 담배들은 그곳이 '대감'의 자리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무당은 젊은 여성이었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자영업을 하는 남편을 둔 평범한 이웃의 얼굴이었다. 신당에 들어가기 전, 거실에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사주에 대해 짧은 대화를 시작했다. 보통 강신무(降神巫)들은 미간을 통해 신의 기운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눈동자와 눈빛은 형언하기 힘든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주치는 순간 혹할 만큼 매력적이었으나,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동자의 색이 미묘하게 변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내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무당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이런 데 올 사람이 아닌데 오셨네요?"


그녀는 아직 내 이름조차 모른다. 이름을 말하려 하자 그녀는 제지했다. 그러더니 내 신상에 대해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잘 맞춘다'고 할 때의 그 정확함을 나는 바로 눈앞에서 목도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비밀들을 서슴없이 꺼내놓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왜 무당에게 이토록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한번 이렇게 점을 보고 나면, 아마 평생 점집을 들락거리게 될 거예요. 그래도 계속 보실 건가요?"


생각보다 양심적인 물음이었다. 수많은 점집 중 우연히 찾아든 이곳에서, 그녀는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양반이 올 것이라며, 신당의 할머니가 며칠 전부터 '책을 읽으라'고 성화를 부리셨단다.


"사장님 댁에 책 많죠? 할머니가 이 사람에게는 절대 욕지거리하지 말고 정중하게 대접하래요."

그녀는 나 때문에 요 며칠 안 읽던 책까지 들춰봤다며 웃어 보였다. 내 사주만 알려주었을 뿐인데, 그녀는 이미 나의 '호구조사'를 끝내버린 상태였다. 우리 집안의 내력, 특히 외할아버지가 객사하셨다는 사실과 그 죽음의 구체적인 양상까지 짚어낼 때는 목이 메어오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친가 쪽 어른들의 허리 질환과 묘소의 문제까지 언급하던 그녀가 대뜸 말을 던졌다.


"이 집은 자손이 참 귀하네. 아들이 아주 귀한 집이었어요. 사장님 할아버지는 삼대독자이시고, 그 윗대 할머니들이 정한수 떠놓고 자손 번창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어요."

틀린 말이 없었다. 우리 친할아버지는 삼대독자였고, 할머니는 지성으로 빌어 아들을 여럿 낳으셨다. 후에 족보를 찾아보니 중시조 때부터 이어져 온 내력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더 놀라웠다. "이 집, 예전부터 굿을 많이 했었네. 굿밥을 먹던 집안이에요!" 그리고는 큰 집 마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물가 옆에 있는 대나무 숲도 보인다고 하는데 소름이 돋았다. 순간 몸이 굳었다. 부모님께 여쭈어보니,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맥이 끊겼을 뿐 예전엔 실제로 그랬다고 하셨다.


끊어진 맥과 대물림되는 운명

혼을 쏙 빼놓는 점사는 아직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신당에 들어가기 전의 전채(前菜) 같은 대화일 뿐이었다. 그녀는 집안의 막내인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막내인 나에게서 대가 끊길 것이라고 했다. "사장님 형이 있죠? 형에겐 딸이 둘이네. 맞죠? 형이 장남 역할을 안 하고 밖으로만 돌아서 그런지 몰라도, 누나... 누나도 있어요? 누나가 복을 많이 받았네. 학업이나 직장 운 같은 거 말예요."


내 사주만으로 줄줄 읊어대는 그녀의 말은 소름을 넘어선 어떤 '위로'였다.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었던 집안 문제들의 근원적인 이유를 이제야 대면하는 기분이었다. 무당의 말대로 형은 딸만 둘을 둔 채 외국에서 체류 중이고, 누나는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서 큰 성취를 이뤘다. 아내와 나 역시 간절히 아이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제는 그 가능성조차 희박해진 상태였다. 그 아픈 구석까지 헤아려주니 신기함을 넘어 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신이 내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느낌. 취재를 핑계로 찾아왔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당은 이를 두고 '재가집(의뢰인)과 무당 간의 사대(事代)가 맞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본적이 같은 전라도라 그런지, 이곳 할머니 신령님이 우리 조상님의 사투리 섞인 말씀을 잘 알아들으시고 소통이 수월하다는 것이다. 소위 '결'이 맞는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양반집이라 예의가 발라서 참 좋대요, 할머니가. 공부하던 집안이라고, 여기 올 때도 책을 들고 올 거라 하셨거든요."


우리 민족의 심층 의식, 무교(巫敎)라는 이름의 뿌리

무당의 점사는 본래 왕의 전유물이었다. 국가의 존폐를 결정하는 자리에 무당이 있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동굿이나 도당굿 같은 마을 단위의 축제들이 공동체를 지탱했다. 우리가 즐기는 마당놀이조차 굿판의 해학을 공연 형식으로 풀어낸 문화적 산물이다. 바닷가의 풍어제 역시 액운을 물리고 풍요를 빌던 숭고한 제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래와 근대화 과정에서의 '미신 타파' 운동, 특히 박정희 시대의 금지령 등을 거치며 마을 단위의 굿은 자취를 감췄다. 정월대보름의 풍습조차 사실은 굿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다. 서양 문명과 기독교의 득세 속에 무속은 핍박받으며 명맥을 이어왔지만, 우리 민족 특유의 기복(祈福)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 예배의 형식 속에 굿의 열정적인 에너지가 녹아들어 살아남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백성들을 위해 [석보상절:부처님의 전기]과 같은 불교 문헌을 번역한 것은(수양대군이 주도하여 편찬함), 고려의 불교적 바탕이 민중의 삶 속에 여전히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 이 땅의 잠재의식을 지배한 것은 불교였고, 그보다 더 깊은 심연에는 '무교(巫敎)'라는 토속 종교가 있었다.


무교는 단순히 미신으로 치부되거나 천박하게 폄훼될 대상이 아니다. 누군가는 종교적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무교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가장 깊이 박힌 뿌리와 같다. 점을 보는 것을 '재미'나 '가벼운 유희'로 여기는 풍조는 역설적으로 기독교적 가치관이 덧씌운 '미신'이라는 프레임의 잔재다. 우리 조상들에게 이것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였고, 무당은 굿판을 통해 무너져가는 집안과 사람을 살려내는 치유자였다. 비록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기구한 팔자라 스스로를 낮추지만, 평생 남을 위해 빌어주는 자들이 바로 무당이다. 거실에 앉아 내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채, 나는 이미 내 안의 모든 속내를 그 젊은 무당 앞에 다 뒤집어 보였다.


"자, 사장님. 그럼 이제 우리 신당에 들어가서 더 자세히 얘기해 볼까요?"

그녀가 드디어 신당 문을 열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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