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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시에르 Oct 17. 2024

반내골

답사와 방문


 [아버지의 해방일지]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의 무대가 된 지리산 자락, 반내골에 가고 싶었다. 이른 아침, 가을의 찬 공기를 가르며 남쪽으로 향했다. 길은 조용했다. 터널 몇 개를 지나며 내리는 운무가 눈앞에 펼쳐졌다. 실제로 본 지리산 기슭의 운무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안개를 깊게 들이마시자 가슴속까지 시원해졌다. 이 공기는 세상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신선하고 깨끗한 향기로 가득했다. 지리산을 닮은 병에 담아 두고두고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례읍에 도착하니 활기 넘치는 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 슬프고 먹먹한 이야기 속 배경이었던 곳이지만, 그곳은 오히려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 열 시가 다 되어야 안개가 걷히고 비로소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 구례구역에서 바라본 섬진강은 마치 넓은 두 팔로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듯했다. 그 광경은 그 자체로 낭만이었다. 문득 옛 시절의 시발택시가 떠오르고, 전라도 사투리로 오가는 말들이 강물처럼 귀에 흘러들었다. 그 소리와 함께 하늘로 뻗는 운무는 이내 갈라지며, 지리산이 그 모든 것을 다시 안아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앞에서 흐르는 섬진강은 마치 우리의 모든 질고를 씻어주는 듯, 조용히 강물에 녹아 흘러갔다.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세월을 떠올리니, 그 짙은 안개는 마치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일깨워주는 것만 같았다. 매일 그 안개를 마시며 자란 정지아가 지리산을 앞장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남다른 체력과 힘으로 지리산을 누볐다고 한다. 단순히 여자의 매력보다는, 여장부로서의 당당함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리라. 백운산과 지리산 사이, 그 중간쯤에서 드디어 반내골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그녀의 정서를 느끼고 싶어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마을을 지나며, 커다란 고목들에 넙죽 인사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리산은 내가 다녀본 산들 중 가장 진지하고 어른 같은 산이었다. 어떤 고민을 털어놓아도 빠짐없이 들어줄 것 같았고, 꾸지람도 서슴지 않는 어른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산을 떠나기 전, 언젠가 다시 찾아뵙겠다고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빨치산은 한때 내게 역사 속 이름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깊이 파고들어 왔다. 단순히 비웃음 섞인 전설로 여겼던 빨치산이, 어느덧 내 안에서 진실을 머금은 채 새로운 의미로 자리 잡은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인생의 유혹도 많아졌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유물론을 공부했고, 흩어진 지식을 하나로 모아 정치철학으로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탐구는 결국 내 안에 숨겨진 욕망을 깨닫는 일이었다. 고상욱 씨가 꿈꾸던 세상. 나도 한 번쯤 꿈꿔보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무임승차하는 나 자신이었다. 어설픈 사회주의 이론을 아는 척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이 때때로 역겨웠다. 겉멋 든 지성을 혐오하던 나였으나, 그와 동시에 스스로가 작은 자본가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혁명, 인민, 민중, 대의, 자유와 해방... 그 단어들은 한때 내게 종말을 의미했으나, 이제는 현재를 살아가고 싶은 내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나는 결국 자본을 사랑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 스스로 죽어야겠다고, 운무처럼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 안개처럼 살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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