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 굿 참관기
이른 아침, 경기도 모처에 자리한 굿당을 찾았다.
"사장님, 길 따라 오다 보면 오른쪽에 보일 거예요. xx호에 있으니 오시면 연락주세요."라는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은 정성껏 예우를 갖춰 신령님을 모시는 '재가집(굿을 의뢰한 집안)'의 굿이 있는 날이다. 굿판을 직접 보고 싶다는 나의 요청에 '당주 무녀(굿을 주관하는 무당)'는 흔쾌히 곁을 내주었다.
예부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굿은 우리 민족에게는 일상이었다. 바닷가 마을에서 보낸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도, 굿이 열리는 날이면 오색의 사탕과 무지개떡이 넘쳐났다. 구멍가게 하나 없던 시골에서 굿판은 그야말로 온 마을의 축제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신난다’는 말의 어원이 바로 무당을 통해 내려오는 그 '‘신명(神明)’'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신명나게 놀아보자’는 것은 곧 신의 기운이 내 몸에 들어와 활력이 넘치는 상태를 뜻한다. 고(故) 황수관 박사가 강조했던 ‘신바람’ 역시 결국 우리 민족 고유의 신령한 기운을 말하는 것이다.
무당이 뛸 때 그가 진정으로 신령님과 합일되었는지는 발끝에서 판가름 난다. 이를 무속에서는 ‘발디딤’이라 한다. 만약 '허주(잡귀)'가 들어 신을 흉내 내는 것이라면 그 뜀이 아주 무겁고 탁하다. 신령님의 위엄이 서린 '신장대(신령의 강림을 상징하는 도구)'를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무구(무당이 사용하는 도구)'는 신의 위력을 담은 성물(聖物)이기에, 제자의 몸에 신이 제대로 '실려야(강림해야)' 그 무게를 이기고 비로소 경쾌하게 솟구칠 수 있다. 그 가볍고 밝은 힘, 그것이 바로 세상을 치유하는 ‘신바람’이다.
굿의 체계를 학술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80~90년대 방영된 다큐멘터리들을 접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방송은 팔도 굿을 소개하며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 문화"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90년대 급격한 경제 성장과 함께 서구식 시장 경제가 들어서며 굿은 어느새 ‘미신’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특히 기독교의 부흥과 맞물려 무속은 거센 탄압과 폄훼의 대상이 되었다.
집안의 '기제사(숨진 날 지내는 제사)'가 사라진 것도 이 무렵부터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옛법’은 가부장적 권위의 산물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엄격한 예절이다. 흔히 죽은 이를 ‘시체’라 부르지만, 우리 전통에서는 ‘유체(遺體)’라 한다. 살아생전 귀한 영혼이 머물다 간 그릇이라는 뜻이다. 혼(魂)은 하늘로 가더라도 백(魄)은 유체 속에 남아 있기에 우리는 이를 ‘혼백(魂魄)’이라 부르며 극진히 모셨다. 이처럼 우리 언어 속에는 무속과 유교의 깊은 철학이 녹아있음에도 우리는 이를 잊어가고 있다. 제사를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라 비하하는 이들도 있지만, 기독교의 추도 예배 역시 조상을 기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제사의 ‘도리(道理)’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흔적은 이곳 이북 굿판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특히 제단 뒤로 걸린 '탱화(무신도)'의 색감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불교 미술을 오래 연구해온 나에게 무속 탱화의 강렬한 채색은 큰 관심사였다. 이북 굿의 미학은 조선 왕실의 예술혼과 맞닿아 있다. 정조 시절 궁궐에서 쫓겨난 화공들이 이북 지역 무속인들과 교류하며 왕실에서만 쓰던 화려한 안료와 기법을 탱화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대신할머니, 장군님, 대감님들이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올 듯 생생했다. 그 장엄한 탱화 앞에는 정성으로 차려진 '진설상(굿상)'이 가득했다.
굿을 의뢰한 집안의 부부를 무속에서는 남자는 '대주(大主)', 여자는 '기주(祈主)'라 부른다. "두 분 나오셔서 총 아홉 번 절하십시오." 당주 무녀가 일렀다. 신령님께 올리는 '삼배(세 번의 절)'를 세 번 반복하며 예의를 갖추는 절차다. 본래 굿은 '열두 거리(굿의 열두 단계)'가 기본이나, 오늘은 상황에 맞춰 그 수를 조절한 '소례굿' 형태였다. 굿의 규모는 비용보다는 재가집의 사정과 신령님의 공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각 '거리(Stage)'마다 무당이 읊는 '무가(巫歌)'와 '경문'은 경건하다 못해 영험한 기운을 뿜어냈다. 굿을 집전하는 무당은 총 여섯 명이었다. 장구나 징을 치는 이들은 대개 '악사'나 '법사'라 불리며, 이들 또한 소명(Calling)을 받은 이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소리로써 신의 기운을 돋우는 '신명풀이'의 주역들이다. 굿이 커질수록 악사의 수도 늘어나는데, 내가 취재했던 한 무당은 3년 차에 올리는 '솟을굿(무당 자신이 신의 제자로서 올리는 큰 굿)'에 수천만 원을 들여 수일간 진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굿은 제자와 신, 그리고 재가집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대한 의례인 것이다.
한 '거리'가 진행되는 데는 보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청배하는 신령님이 매번 다르기에 이른 아침 시작한 굿은 밤이 깊어서야 끝을 보이기 마련이다. 대주와 기주의 절이 끝나고, 장단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당은 각 거리의 신령님에 맞춰 '무복(巫服)'을 갈아입고 그에 걸맞은 무구를 들었다. 장군 거리에선 칼을, 불사 거리에선 고깔을 쓰며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했다.
드디어 방울 소리가 날카롭게 굿당의 공기를 갈랐다. 무당의 발이 지면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곧 신령님이 '강림(降臨)'하실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 나와 담소를 나누던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초점을 잃은 듯하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동자 속으로 형언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렸다. 무당의 몸짓은 이제 ‘뛴다’는 표현조차 부족해 보였다.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유영에 가까웠다. 아까 언급했던 ‘가볍고 경쾌한 뜀’이 무엇인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잡귀가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정순한 신명이 실린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천상의 춤사위였다. 작두 위에 오르거나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는 모습은 공포보다는 경외감을 자아냈다. 재가집 부부는 어느새 바닥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무당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공수(신의 계시)'는 매서운 호통이기도 했고, 때로는 어머니의 손길 같은 위로이기도 했다.
“야 이놈들아, 내가 왔다. 너희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느냐.”
그 한마디에 90년대 이후 ‘미신’이라는 이름 아래 억눌려왔던 한(恨)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굿은 단순히 복을 비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산 자에게는 삶의 의지를 북돋아 주고, 죽은 자에게는 못다 한 정을 나누는 거대한 ‘치유의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