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평행선이 만나는 순간 1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by 닥터맥리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때가 있다.

평행을 달리던 선들이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브랜치 사정은 날로 악화되었고 우리 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적이 안 좋아지니 팀들이 통폐합되어

어제까지는 다른 팀이었던 구성원들과 한 팀으로 묶이게 되었는데

통합의 대상인 그 팀에는 빌런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었다.


빌런 1. 나이가 벼슬

본인은 나이가 많아서 어려운 일은 못하니 젊은 사람들이 하라며 쏙 빠지고

대접만 받으려 하는 빌런. 여기에 갑질 추가.

빌런 2. 내로남불 쌈닭

예산을 자기 쌈짓돈 마냥 써대면서 다른 사람이 그러는 꼴은 죽어도 못 봄

매일 아침 오늘은 또 누구랑 싸우나 결심하며 출근하는 빌런.

이 두 빌런이 서로 싸우면 진짜 답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근무하는 브랜치는 전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한때는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도시.

뼛속까지 서울사람인 나는 그 지역의 낙후된 환경에 적응이 안 되었고

회사사람 말고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타향살이를 아주 제대로 하고 있었다.


빌런들의 괴롭힘과 객지생활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본부 파견 신청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볼까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본부는 업무강도가 매우 높고 출장이 잦아 모두 기피하기 때문에

본부에 3년 이상 근무하면 가고 싶은 브랜치로 전보를 우선 고려해 주는 혜택이 있었다.


본부에서 존버해서 서울로 전보를 신청해 볼까?

망설여진 이유는 악명 높은 업무강도도 있지만 본부의 위치였다.

본부는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모처에 있기 때문에

여기 생활을 정리하고 이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타향살이의 시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부는 가고 싶다고 다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다.

전체 브랜치를 관리하고, 조직의 높은 분들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지원자들의 평판조사를 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데려가지 않았다.

지원하면 과연 날 뽑아줄까?

난 이 조직에 들어올 때부터 최대한 티 안 나게 붙어있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에

본부입장에서 보면 나는 그야말로 '듣보'였다.

고민하는 사이 본부 근무자 공모 기간은 끝나버렸고

6개월 후에 다시 생각해 보자로 마음을 정리했다.


공모가 끝난 한 달 뒤, 당시 광풍이 불던 코딩을 배워보겠다고 본부에서 실시하는 연수를 신청했다.

이거라도 배워야 저 빌런들을 하루라도 빨리 안 보게 이직을 하든 뭘 하든 하지.

두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던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아 진짜... 이거 잠깐 한눈팔면 못 따라가는데 누구야 하며 휴대폰을 확인한 순간

응???

H였다.

내가 본부에 연수 왔다는 얘기를 듣고 전화했나?

(솔직히 그럴 사람은 아닌데)

나도 확 씹어버릴까 하다가 왜 전화했는지가 궁금해서 쉬는 시간에 콜백을 했다.

몇 년 전 내 전화를 씹던 인간이 맞나 싶게 그는 냉큼 전화를 받았다.


H: 이팀장님~ 오랜만이어요

나: 네 그러네요. 저 본부에 연수 왔어요

H: 아 그래요

나: (내가 연수 온 거 알고 전화한 게 아니군 그러면 그렇지) 그런데 무슨 일로?

H: 이팀장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 (역시 뭔가 아쉬운 게 있었군) 아 네~ 무슨 일인데요?

H: 본부에 오셔서 저를 좀 도와주세요.

나: 네, 도와드려야죠.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H: 오셔서 일을 좀 하시면...

나: 본부회의에 부르시는 거구나. 회의가 언제예요?

H: 아니 그게 아니고 본부에 파견 오셔서 일하시는 거요

나: 네???!!!


이게 무슨...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에 말문이 막혀 어버버 하는 동안

그는 지금 본인이 준비 중인 프로젝트와 그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만든 TFT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 그 팀에 우리 동기 W가 이미 와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전 중으로 인사부에 통보해야 한다며 바로 결정하라고 했다.


나: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을 좀 해봐야...

H: 빨리 결정해야 해요. 늦어지면 낙하산이 올 거거든요

낙하산보다는 동기끼리 일하면 팀 분위기도 좋을 거고 프로젝트도 더 잘 될 거니까

나: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일단 거처도 그렇고 이사도 그렇고 ;;;

H: 다 잘 처리할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결정만 하세요

이팀장님 서울 올라오셔야죠. 본부에서 3년 이상 근무하면 원하는 브랜치로 갈 수 있는 거 아시죠?

팀장님 같은 능력자가 그 안 되는 브랜치에 계속 있으면 손해예요


안 그래도 고민하던 본부였는데...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하고 본부 소식에 정통한 동기 몇 명에게 재빠르게 전화를 돌렸다.

한 명은 얼른 가라 하고, 다른 한 명은 가서 뭐 하냐 했다.

그러나 '서울 올라가려면 본부 3년이 좋은 방법이긴 하다'였다.


하...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그때 문득 서울을 가든 어디를 가든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쨌든, 언젠가는 한 번은 움직여야 한다.


나: 근데 왜 하필 저예요?

H: 회장님이 Y브랜치에서 한 분 모시라고 하셨는데

Y에 누가 있나 봤더니 이팀장님 계시더라고요


응?

쎄-----하다.

나랑 일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회장님이 시켰다고?

회장님이 찍은 브랜치에 내가 있어서 나라고?


나와 일하고 싶어서도, 내 능력을 인정해서도 아니었다.

회장님이 찍은 브랜치에, 우연히 내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회장님의 지시라는 명분 Y브랜치라는 조건이 맞물린 체스판에

가장 만만한 말을 하나 골라 올린 것뿐이었다.


나의 연락을 씹던 그가 나를 '능력자'라 치켜세우며 회유하는 이 상황,

평행선을 달리던 우리가 억지로 꺾여 만나려는 이 순간,

피하는 게 맞았을까, 받아들이는 게 맞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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