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요
H와 일하는 건 쉽지 않았다.
업무지시를 하면서 그는 일의 진행방향이나 나와야 하는 결과에 대해 잘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양식으로 작성해야 하는지 조차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물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내가 초안형태로 만들어서 가져가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말씀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초안입니다.
H: (어이없다는 표정) 이게 뭐야. 너무 약한데
이것도 별로고, 저것도 별로고, 어쩌고 저쩌고(까기 바쁨)
나: (알려준 게 없으니 당연히 '별로'일 수밖에 없잖아!!! 어이없지만 어금니 꽉 깨물고)
네 알겠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초안이니까... 어떻게 보완할까요?
H: 그건 담당이 알아서 해야죠.
나: 네? (당황) 아니 그러니까 팀장님이 원하는 방향이 있으실 거 아녜요
H: 잘 들어요, 1번~ (이미 했던 알맹이 없는 들으나 마나 한 설명)
나: 그럼 ~~~ (내가 생각한 보완방향 설명) 이렇게 할게요.
H: (건성으로) 네네
이 뒤로 스무고개 같은 초안 2, 3, 4 등등이 오고 가면 그 사이 그가 감을 잡고 계획안을 마무리했다.
이럴 땐 본인도 어떤 결과가 나와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반대로 원하는 게 확실할 때도 있었다.
H: 이렇게 이렇게 (블라블라 원하는 것 설명) 이런 거 이런 거 해오세요. 회장님 보고하게
그가 지시한 업무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 큰 틀에서는 일리가 있어 보였지만 디테일이 생략되어 있었고
디테일과 큰 틀은 서로 방향이 달랐다. 마치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나: 으응? 그렇게 진행하려면 먼저 예산을 증액해야 하는데 예산 여유가 없어요. 예산확보 계획이 있어요?
H: 예산은 없어요.
나: 네? 계획시행 선행조건에 예산이 ㅇㅇ억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없으면 일이 안 되는데요???
H: 그냥 좀 해요. 안되다고 하지 말고
쉽게 설명하면 A를 하기 위해 B라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한데
소프트웨어 구독을 위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 없지만 안된다고 하지 말고 A를 하겠다는 계획안을 작성해 와라
뭐 이런 거다.
A를 진행할 담당인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선행조건은 무시한 채 업무를 진행하면 발생될 수 있는 문제점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회의실로 데리고 갔다.
H: 이팀장. 다른 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요.
어떻게든 공격할 거리를 찾고 있는데 나를 도와줘야죠.
내가 하라고 하면 해야지 안 된다는 소리만 자꾸 하면 안 돼요
나: 예상되는 문제들이 있는데 그냥 진행하는 건 담당자로서 부담이 돼서요
(대처할 방법도 없이 진행했다가 일 터지면 그게 더 공격거리라는 걸 이 인간은 모르나???)
A를 하려면 B가 있어야 한다니까요
H: B를 도대체 몇 명이나 쓴다고 그러는 거예요
나: A를 하려는 사람들은 다 쓰죠
H: 그러니까 그게 몇 명이나 되냐고요?
나: (몇 명이나 되냐니 도대체 이 유치한 질문은 뭐지????)
몇 명인지 정확한 숫자를 저는 알 수 없죠. 일단 저는 씁니다.
B가 없는 상태에서 A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H: (어이없고 한심하고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아 일단 해요. 회장님이 보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냥 맨 마지막에 필요예산 적으세요.
이쯤 되면 A를 진짜 하겠다는 게 아니라 A를 하는 척하는 계획안이 필요하다는 얘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길 바랐지만 나중에 내 생각이 맞았구나가 밝혀지는 일이 생기고야 만다)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이를 이용해 내 입을 막는 언행.
그때는 몰랐지만 명백한 가스라이팅이었다.
원하는 게 수시로 바뀔 때도 있었다.
나: 말씀하신 ㅇㅇㅇ계획입니다
H: 이건 이게 아니고, 저건 저게 아니고~~~~
나: ??? 지난번에 ~~~라고 말씀하셔서 참고해서 적성한 건데...
H: 이건 이게 아니고, 저건 저게 아니고~~~~ (반복)
나: 그럼 ~~~ 로 수정해서 보완할게요
수정 보완본이 바로 오케이 됐을까?
그럴 리가. 그가 원하는 바는 또 바뀌어있었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나는 화가 났다.
나: 생각이 바뀌었으면 이런저런 이유로 바뀌었다고 설명을 해주셔야 저도 이해를 하고 업무를 진행할 텐데
이유 없이 계속 다른 방향을 말씀하시니 혼란스러운데요
H는 나를 회의실로 불러 또 그놈의 '다른 팀이 지켜보고 있다'를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지켜본다는 건지...
생각이 바뀐 이유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이 모든 난관을 뚫고 완성된 계획안은 항상 H가 혼자 들고 들어가 보고를 했다.
끝까지 나와 합의가 안 된 내용을 H가 원하는 대로 맘대로 바꿔서 보고하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공과 칭찬은 H의 차지였다.
나는 그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안을
말이 되게 다듬어서 문서로 만들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쎄--------하다.
H옆에는 영혼의 단짝 W가 있었다.
그들은 그냥 넘겨도 될 것 같은 일도 파르르 떨면서 확대해석하고
무조건 자기들을 시기질투하는 세력의 공격으로 여겼다.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증폭시키며 장단을 맞춰주는 전략적 제휴관계?
가만히 보면 스스로를 이 조직에서 뭔가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아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스스로를 나부랭이라 생각하는 나로서는... 신기했다.
W가 H와 영혼의 단짝인 이유는 하나 더 있었는데
H의 디테일 없이 구멍 숭숭 뚫린 아이디어를 군소리 없이 문서로 잘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브랜치 경험이 있으므로 그런 아이디어가 얼마나 브랜치를 혼란에 빠뜨릴지,
어떤 문제를 발생시킬지가 자꾸 보였다.(나도 문제라면 문제다. 진짜)
나와는 달리 W는 입사 후 본부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브랜치들의 현실과 사정을 잘 몰랐으므로
H의 말에 따라 네네 하며 문서를 있어 보이게 잘 작성했다.
그러다 보니 H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W에게 단기적인 업무를 많이 시켰다.
내일 당장 필요한 보고서, 2-3일 내로 나와야 하는 계획안 등
W는 그럴 때마다 동기인 나와 나이가 어린 K에게 본인이 문서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찾아달라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시켰다.
J는 입사가 늦기는 했지만 나이가 좀 많았기 때문에 시키기 껄끄러웠겠지.
나는 지가 뭔데 퇴근시간 다 돼서 이런 걸 시키나 싶었지만 그냥 동기 도와준다 생각하고 찾아줬다.
자랑 같지만... 컨설팅 회사 경험이 있는 나는 자료를 좀 잘 찾는 편이다.
W는 내가 자료를 전달할 때마다 왜 이렇게 잘 찾지? 어쩜 이렇게 원하는걸 딱딱 찾지? 호들갑을 떨었다.
W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의미 없는 칭찬이었고 이런 칭찬을 통해 나를 조종하려 한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아, 이 점도 두 사람이 영혼의 단짝일 수밖에 없는 충분조건이었다.
둘 다 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