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할 줄 모르는 리더
브랜치로 다시 갈까 하는 고민에는 멀고 먼 출근길도 한몫하고 있었다.
사택 배정해 준다더니 어떻게 된 건지 ;;;
나: 팀장님, 저 사택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출퇴근이 넘 힘들어요
H: 그러게요. 잠깐만요
(총무부에 전화함) 아 네 사택 담당자시죠? 우리 팀에 Y에서 이 팀장님이 올라오셨는데
집이 멀어서 사택이 필요하신데 어떻게 안 되나요? (~~~) 네네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정기인사가 아닐 때 오셔서 당장은 사택이 어렵데요. 정기인사 때 조정해 보고 알려주겠데요
나: (헐~) 그게 언젠데요?
H: 1월 말~2월 초 정도?
나: (IC... 한 달을 왕복 세 시간을 다니란 말이냐) 그때 되는 건 확실해요?
H: 그때 가봐야 안데요
당장 사택 내줄 것처럼 큰소리치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약속을 헌신짝처럼 잘도 버리는구나 아오
그렇게 줄창 전화만 하면 사택을 주냐고요!!!
Y에 집은 그대로 두고 몸만 올라온 상태라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도로 갈까, 아냐 일단 올라왔는데 좀 버텨보자, 빌런 1은 피하기로 했잖아
두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면 밤에 잠이 안 와야 하는데
왕복 세 시간의 고된 여정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잠은 잘 자고 있었다.
고된 출퇴근을 이 주 동안 하고 있던 중
기획국장과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국장이 물었다.
국장: 이 팀장님, 본부생활 적응은 좀 하셨어요? 불편한 점은 없으시고?
나: 국장님.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요. 왕복 세 시간이어요
국장: 사택 배정 못 받았어요? H는 뭐래요?
나: 정기인사가 아니라 지금 당장은 안된다는데 저는 넘 힘드네요
국장은 잠깐 생각하더니 본인에게 배정된 보직자 사택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아 비어있으니 거기 일단 들어가라고 했다.
야호!
H가 해결 못한 사택문제를 셀프로 해결한 순간이었는데
'중요한 문제의 셀프 해결'은 이게 시작이었다.
사택에 입주하자 출퇴근 스트레스는 줄어들었고 본부근무를 다시 냉정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아 뭐가 이상해. 쎄해. 모든 게 불확실해. 고생만 더럽게 하고 서울 못 가면 어떡하지'
'본부 경력이 앞으로 이 조직 내에서는 뭘 하든 도움이 될 텐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해볼까?'
어느 것이 이겼는지는 독자들께서 이미 아실 테니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본격적인 본부 근무가 시작되었다.
의아했던 것은 H와 W는 회의만 갔다 오면 분개하며 쑥덕쑥덕 하면서
누군가를 가루가 될 때까지 까기 바쁘다는 것이었다.
H: 기획부장 도끼눈 뜨는 거 봤어? 내 혁신적인 안이 지들 밥그릇 건드린다 이거지
W: 그러니까요! 우리가 다 잘되자고 하는 건데 왜 저러실까 진짜?
우리 회사는 전문직과 사무직, 크게 두 직군이 있었는데
인원은 전문직이 훨씬 많지만 조직의 헤게모니는 사무직이 쥐고 있었다.
회사의 이려운 일, 중요한 일은 전문직이 도맡아 하고 성과가 안 나면 욕을 먹었는데
사무직은 욕 먹는데서 열외였다.
거기에 조직의 생명인 돈과 자산을 다루는 부서는 철저히 사무직이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 팀 사람들은 모두 전문직이었다.
H와 W는 전문직과 사무직을 갈라서 사무직, 그 중에서도 높은 보직자들을 집중적으로 깠다.
그들이 특히 우리팀을 없애려고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는게 이유였다.
그리고 전문직 중에서도 입사 연차가 오래된 사람들도 씹어댔다.
실력도 없으면서 먼저 들어왔다고 유세떨고 묻어가려 한다는게 이유였다.
둘이 분통을 터뜨리며 하는 얘기만 들으면 여긴 회사가 아니었다.
좋게 표현하면 전쟁터, 리얼하게 표현하면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궁중 같았다.
막 승은을 입은 젊고 예쁜 궁녀를 질투한 나머지, 밥에 독약이라도 타려는 늙은 후궁들.
H는 늘 ‘넘 잘나서 공격받는 가련한 주인공’ 코스프레를 하며
하루 종일 타 부서 뒷담화로 에너지를 충전했다.
'에이 설마 그럴까... 과장이 좀 심하시네' 그냥 듣고만 있어도 기가 쭉쭉 빨렸다.
어느 순간 너무 듣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이어플러그를 꽂기 시작했다.
그 순간, 쎄----함과 동시에 그가 사택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 이유를 퍼뜩 깨달았다.
무능하거나 혹은 나쁘거나.
타 부서 뒷담화나 할 줄 알았지 협력은 할 줄 모르는 무능함.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공격받는다’는 피해의식은 사실 본인의 독선의 대가일 확률이 높았다)
팀원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도구일 뿐, 약속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
(사택은 나를 본부로 불러올리기 위한 미끼였을 뿐)
내 이어플러그는 단순히 소리를 차단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덧: 이때 나는 이어플러그로 귀를 꽉 막아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