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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살다 Jan 09. 2021

전주한옥마을에서 길을 잃다.

전주 토박이의 시선 ..

사실 전주시 토박이들은 전주한옥마을에 잘 가지 않게 됩니다. 

14대를 전주에서 살아 온 집안에서 태어난 저 역시 그렇습니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까이 있던 한옥마을은 그냥 놀이터였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삼삼오오로 몰려다녔습니다. 까까머리 신사들이 우루루 다니며 양갈래 머리를 한 여중생들에게 눈길을 주던 거리에 이발소와 호떡집이 있었고 천장이 낮은 집에 베테랑칼국수가 있었습니다. 골목 대포집에서는 탁사발 한 잔에 구성진 노래 가락이 흘러나오거나 판소리 한 소절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은 서민들의 애환과 위트가 담겨 있었습니다.  



경기전에는 자그마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전주한옥마을 입구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셨던 경기전이 전동성당과 마주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경기전에 있는 조경단에서 자그마한 백발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분께 꾸벅 인사드리고 사탕 한 줌 받았던 기억이 잊그제 같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할머니는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딸인 문용 옹주이셨습니다. 어지러웠던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절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염 상궁에게 태어났던 옹주님은 영친왕의 어머니인 귀빈 엄씨의 모략으로 어머니를 잃고 파란만장한 인생 길에 올랐다가 1987년 문용 옹주는 그 한 많은 세월을 마치셨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은 항쟁의 시작점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가톨릭센터와 함께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항쟁의 본거지였습니다. 마을과 인근에서 민주화시위가 늘 시작되곤 했습니다.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는 시위대들이 백골단을 피해 도망가면  몇몇 한옥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집안에 숨겼습니다. 폭정에 항거하던 역사는 한옥마을의 시작과 함께 했습니다. 1920년대 일제는 전주의 민족상권을 잠식하고자 지금 한옥마을을 신도시지구로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자 뜻 있는 전주 백성들이 마을로 들어와 살았습니. 마을주민들은 일제가 전주성을 부수고 버린성벽 돌들을 가져다가 경기전 주변에 깔며 항일의식을 높였습니다. 남문밖시장(지금 남부시장)의 민족자본을 일제에게 빼앗기지 않고자 치열히 싸웠습니다. 숨가쁜 역사의 장면 장면이 한옥마을에 서려 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에는 본인들도 거주를 했지만, 뜻 있는 양반가와 남문밖시장 상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습니다. 저의 집안은 한옥마을이 조싕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향교 근처에 양반가들이 살던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 한옥마을이 조성되고 집안 사람들은 남문밖시장 상인들은 깊은 유대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옥마을은 의 본적지요, 집안의 오랜 이야기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길을 잃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기억 속 한옥마을은 지금 유명한 관광지가 된 전주한옥마을과 무척 릅니다. 상업화된 한옥마을이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애환과 위트가 넘치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나의 집안 이야기가 자아내는 향수 가운데 나는 한옥마을에서 길을 잃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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