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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살다 Jan 09. 2021

해부극장 그리고 생물표본

과학사에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의 초상


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과학 전시가 본격적으로 생겨났습니다.

당시에 볼거리가 별로 없던 터라, 의학교에서 해부학 실습을 할 때면 수많은 인파가 학교로 몰려와 학생들과 함께 해부실을 매웠습니다. 그래서 해부실은 해부극장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 해부극장이 유명했습니다. 유럽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17, 18세기경 부유층은 세계 각지에서 모은 희귀한 동식물 표본과 화석 그리고 광물을 개인 캐비닛에 모아두었다가 개인 전시를 했습니다. 이런 전시는 당시 부의 척도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해부극장과 전시 캐비닛에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 그늘진 곳에서 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초상이 담겼습니다.



상당 오랜 기간 유럽에서 인체 해부는 불법이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 명의 중 한 사람이던 갈레노스도 국법으로 인해 인체 해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289년 교황 니콜라우스 4세의 공식 승인을 받아 프랑스 몽펠리에 의학교에서 매해 의사 한 명당 한 구씩의 시신 해부를 했습니다. 인체 해부에 대한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자 16세기에 들어서서 사형수 시신을 대상으로 해부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18세기 중후반 사형수 시신 대상으로 한 인체 해부가 합법화되자 유럽 각국에서 의학교가 불일 듯 생겨났고 해부용 시신 부족 사태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신절도범도 생겨나 사회적 물의를 빚었습니다.


그림 1. 라이덴대학교 해부극장


인체 해부는 유럽 사회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합법적 인체 해부 시행으로 유럽에서 이발사와 외과의의 사회 지위가 상승했습니다. 그 이전에 외과의는 의사에 끼지 못했습니다. 오랜 동안 유럽에서 의사는 병의 원인을 고찰하는 철학 방법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보면 내과의, 병리학자 등은 의사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외과의는 의사라기보다는 원인 탐구보다는 치료를 시행하는 기술자였습니다. 전쟁 통이나 일상에서 유럽인들은 외과의를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발사가 외과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 이발소 문 옆에는 빨강-파랑-흰색 등이 있습니다. 빨강은 동맥, 파랑은 정맥, 흰색은 붕대를 상징합니다. 인체 해부로 사회 저층에 있던 이발사와 외과의가 가슴을 열어젖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신을 해부하면서 그린 인체 해부도와 오늘날 인체 해부도를 비교해 보면 콩팥이 무척 컸습니다. 18세기 의사들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해부된 인체가 그리 말하니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오늘날 인체 해부도의 콩팥과 당시 콩팥은 왜 이리 차이가 났을까요?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사용된 해부용 시신은 대부분은 사형수나 가난한 사람의 몸이었습니다. 사형수라고 해서 모두 다 중범죄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보면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에 가난도 범죄였습니다. 해부용 시신은 거의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가난이 주는 스트레스로 인해 스트레스 억제 호르몬이 분비되어 이들의 콩팥은 비정상적으로 커졌습니다. 참으로 씁쓸한 유럽 해부학의 풍경입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다양한 생물 분과들이 등장하고 발전했습니다. 박물학, 세포학, 동물학, 식물학, 고생물학, 발생학 등이 생물학 진영에 속하게 되어 가히 생물학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생물 전시로 이어졌습니다. 17, 18세기경 부유층의 개인 캐비닛에서 시작된 생물 전시는 규모가 커져서 호기심방(wonder room)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집의 일부를 아예 전시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19세기가 되자 호기심방은 개인 수준에서 국가 수준으로 커집니다. 대항해 가운데 가져온 다양한 표본들을 식물원, 동물원, 해부 극장 등에서 전시하였으며, 여러 생물학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그림 2. 18세기 유럽 호기심방


해부되어 전시된 동물 그리고 여성

19세기 생물표본 전시와 강연에는 국가 차원의 전략도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제국주의 열풍 속에서 여러 제국은 전염병 치료뿐 아니라 생물표본 전시를 통해 자국의 통치력과 식민지배를 선전하였습니다. 이런 풍토는 남성 중심 사고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감 가운데 인권과 참정권에 눈을 뜨는 여성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책이 출간되고 모임이 생겨났고 여성운동의 씨앗이 심겼습니다. 이들 여성은 해부되어 전시된 여러 동물을 보면서 19세기 여성 또한 비슷한 신세 즉 남성의 통치를 받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과학사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은 당시 사회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해부극장의 해부용 시신과 호기심방의 생물표본은 당시 유럽 사회의 계층 간 차별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회 약자는 자신의 몸에 새긴 사회적 주홍글씨는 품고 살았습니다.

그림 3. 19세기 생물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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