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수 8시간전

C14. 자식한테 져주는 어버이의 이야기

  - 비키 젠슨 & 비보 버즈론 & 롭 레터맨, 〈샤크〉

C14. 자식한테 져주는 어버이의 이야기 – 비키 젠슨 & 비보 버즈론 & 롭 레터맨, 〈샤크〉(2004)

부모를 이겨야 하는 자식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승패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퍽이나 고약한 말이지요. 하지만 영원한 명언이요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자식은 언제나 부모를 이깁니다. 또는, 자식은 반드시 부모를 이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한테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사 진짜 어떤 대결의 결과를 의미하든, 아니면 상징의 차원에서 어떤 형이상학적 메타포이든,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이기는 사태가 벌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 그들도 그들의 부모한테 이기고야 오늘에 이르렀으니까요.

   자식이 부모를 이길 힘이 없다면 부모는 그 자식한테 고의로 져주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요, 자연계의 원리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누구도, 아무것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한 퇴보를 넘어서서 죽음을 의미합니다. 상징의 차원에서든, 실존의 차원에서든.


자식한테 져주어야 하는 부모

   이는 역사적으로도 누누이 실증되어온 사실이지요.

   부모가 자식을 이겼다는 것은 곧 자식을 망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망쳤다는 것은 곧 미래를 망쳤다는 뜻이지요.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이김으로써 조선의 미래를 망쳤습니다. 조선왕조의 몰락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망친 그 순간부터 사실상 시작된 것입니다. 재위 기간이 워낙 짧기도 했지만, 손자 정조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결국 그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지는 못했습니다.

   반면, 또 다른 아버지 다윗은 자신을 공격해 오는 아들 압살롬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는 다만 아들을 계속해서 피해 다니기만 하였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영광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니, 부모는 자식한테 져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한테 지는 것은 자식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이 사태를 다른 말로 일컬으면 ‘사랑’이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식 하나만이 아니라 미래 전체가 위태롭습니다.

   훌륭한 부모란 곧 자식한테 져주는 부모입니다. 또는, 져주는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뻔한 승패의 결말

   하니,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 것인지의 여부가 궁금하다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이기는 것으로 결말이 나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따라서 이 겨루기의 결말은 처음부터 자명한 것입니다.

   아버지 상어와 아들 상어 사이의 갈등을 축으로 한 애니메이션 〈샤크〉가 뻔한 결말을 향하여 가는 이야기인 것은 그래서입니다.

   아버지 상어는 아들 상어를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상어는 아들 상어를 몹시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가 지닌 결말이 뻔한 것은 결코 약점이 아닙니다. 때로는 뻔한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따금 불가사의하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하는 까닭은 그것이 뻔한 것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란 다양한 형태로 거듭 발화(發話)되어야 한다는 알베르 카뮈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초식 상어 이야기

   그래도 〈샤크〉의 아이디어가 기상천외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바다의 폭군 상어는 분명히 육식(肉食) 동물입니다. 이 육식의 ‘육’에는 때로 사람도 포함됩니다.

   영원히 ‘넘사벽’일 것 같던 수익 1억 달러 고지를 마침내 점령하여 영화사상 최초의 ‘블록 버스터’라는 명예를 얻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출세작 〈죠스〉(1975)는 바로 식인(食人) 상어를 소재로 한 영화였지요.

   상어는 피를 좋아하여 피를 찾아다니고 피비린내를 몰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도 벌써 드라마틱합니다.

   그러나 〈샤크〉의 중심인물(주인공)인 아들 상어 레니는 전혀 상어답지가 않습니다.

   왜냐고요? ‘초식(草食)’ 상어니까요.(세상에!)

   그러니까 〈샤크〉는 식인 상어가 아니라, 초식 상어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초식동물인 소한테 육류로 만든 사료를 먹인 인간의 만행이 급기야 광우병을 초래하고야 만 안타까운 전례를 떠올려 보면, 초식 상어의 출현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초식 상어의 아버지

   그러니 아버지 상어인 돈 리노(로버트 드 니로)로서는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들 상어에게 육식 상어의 본성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이 아버지 상어가 갖은 애를 다 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 또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들 상어는 아버지 상어에게 더 큰 사랑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채식주의’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지요.

   이 테마를 조금 더 밀고 나아가면 ‘다름’에 대한 이해의 범주로까지 해석의 영역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다른 일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문제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 아닙니까. 여기에는 종교와 피부색과 민족과 국가와 계층과 학벌과 성별과 나이를 비롯한 수많은 갈래가 다 포함됩니다. 세계 평화의 관건이 여기에 걸려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샤크〉에서는 아버지 상어가 아들 상어의 ‘다름’을 인정하기까지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이 이야기의 몸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20년 전인 지난 2005년도에 작가 한강의 중편소설 〈몽고반점〉이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을 때도, 그 뒤로 10년쯤 지난 2016년도에 이 〈몽고반점〉이 포함된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수상했을 때도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잠잠했지요. 적어도 요란하게 떠들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한데, 그 뒤로도 또 10년쯤 더 지난 지금 한강 작가가 단일 작품에 수여하는 것도 아닌, 한 작가의 작품활동 전체에 대한 평가로 수여하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나자 새삼스럽게도 기다렸다는 듯 콕 집어 《채식주의자》를 논란의 중심에 서게 한 세태는 참 아이러니합니다.)


져주는 것의 결과

   여기서 우리가 기어코 확인해야 할 것은 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의 결과입니다.

   당연히, 아버지 상어는 아들 상어의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합니다. 져준 것이지요. 훌륭한 아버지입니다.

   그 결과 구원받은 것은 아들 상어만이 아닙니다. 상어에 대한 공포에 떨던 물고기 세계 전체가 평화를 얻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한테 져주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여기서 굳이 자연계의 질서, 곧 생태계의 문제를 포함한 리얼리티의 여부를 따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