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기다림_4

- 4. 어머니의 손길

by 김정수

4. 어머니의 손길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다. 눈을 감지 않고도 들을 수 있다. 청각이 예민해져 있다. 환자가 소리에 민감한 까닭을 비로소 알겠다.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만 하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를 곤두세우게 된다. 청각이 예민해져 간다.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꼭 보아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인생이 그렇듯이. 믿음이 그렇듯이. 창조주의 섭리가 그렇듯이. 열린 창틈 쪽으로 가만히 팔을 뻗는다. 손끝에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바람은 높은 곳에서 여기까지 내려올 생각이 없다. 나는 바람을 눈으로 확인한다, 기어이. 창에 비치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 살랑살랑 움직인다. 손을 뻗어 만지고 싶다. 냄새를 맡고 싶다. 하지만 그림자는 허상이다. 나뭇잎은 밖에 있다. 만지려면, 냄새를 맡으려면 나가야 한다. 그럴 수 없다. 눈을 감는다.

끼니때마다 먹어야 하는 약에는 진통제도 들어 있다. 그렇게 자고도 나는 어김없이 몰려오는 졸음에 기꺼이 응한다. 약효 때문만이 아니다. 내 몸이 잠을 원한다. 그걸 나는 느낀다. 오래된 결핍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 없이 실컷 자본 기억이 없다. 공부하느라, 운동하느라, 연애하느라, 일하느라, 그리고 고민하느라. 충분히 잔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알 수 없다. 자보니 알겠다, 내가 그동안 잠이라는 것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그러니 어쩌면 진통제는 통증보다는 수면 부족에 대한 처방인지도 모른다. 의사는 그걸 알고 있는 것이다. 약을 먹으니 잠이 오고, 잠이 오면 잠을 잔다. 그뿐이다. 그러면 통증은 완전히 사라진다, 적어도 그동안만큼은. 꿈도 없는 잠이다. 몸이 잠을 거부하지 않는다. 몸이 거부하지 않는 잠은 깊다. 지금 내 몸은 잠과 그 어느 때보다 사이가 좋다. 휴식의 가장 온전한 상태. 나는 정말로 쉰다. 쉰다는 느낌으로 쉰다. 이런 건 처음이다.

확실한 병자로 취급받는 상태는 염치를 없앤다. 무엇을 해도 떳떳하고, 무엇을 못해도 떳떳하다. 갓난아기처럼 누운 채로 배설을 해도, 떠먹여 주는 것을 받아먹어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이 떳떳함이 마음에 든다. 금세 익숙해졌다. 어머니도 벌써 능란하다. 어머니는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솜씨는 그대로다.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주고, 약을 먹이고, 뱃가죽을 뚫고 나온 고무관 끄트머리에 연결되어 있는 투명한 바일 백에 체액이 얼마나 담겼는지를 측정하고, 내 팔다리를 주무른다. 그리고 내가 잠드는 것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물러난다. 하도 오랜만이라 낯설지만, 분명히 익숙한 손길이다. 내 몸이 어머니의 손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몸의 기억력은 비상하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 아팠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어머니의 손길이었다. 아내는 서툴렀다. 당연하다. 아내도 누구를 돌보는 처지가 되기는 처음이었을 테니까. 내 몸은 솔직하게 반응했다. 내 몸이 원하는 손길은 아내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멀리 있었고, 아내는 내 바로 곁에 있었다. 아내도 나도 서로한테 익숙해져야 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았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아내는 아내였고,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아내의 손길과 어머니의 손길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같을 수가 없었다.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어머니 쪽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떤 핑계나 명분으로든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세월은 아버지를 늙게 했다. 그게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희끗해진 머리. 깡마른 체구. 무엇보다도 총기가 많이 사라져 트릿한 눈빛. 아니면 독기나 광기가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눈매가 순해져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나운 기운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화를 내거나 욕설을 내뱉지 않을 것만 같다. 아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세월은 아버지한테서 많은 것을 덜어내거나 빼앗아 가는 데 제법 성공한 모양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런 세월을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저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남편으로 어떻게 참고 견뎌내었던 것일까.

그날 밤 아버지는 철야기도회에 참석하러 교회에 간 어머니를 강제로 끌고 왔다. 흡사 어른이 막무가내로 떼쓰는 버르장머리 없는 말썽꾸러기 아이를 혼내줄 심산으로 짐짓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함부로 붙잡아 끌고 오듯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는 그야말로 꼴사나운 몰골로 질질 끌고 왔다. 신앙간증집에서나 보던 추태가 실제로 내 눈앞에 벌어진 것이다. 나는 심한 감기 몸살을 앓고 있었다. 목이 부었고, 열이 났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중학교 때였다. 증세는 고약했지만, 해마다 환절기에 한 번씩은 겪어온 터라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앓느라 정신머리가 온전치 않았다. 뭐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버지는 화가 나 씩씩거리면서 군데군데 녹이 슨 철 대문을 거칠게 쾅쾅 여닫고는 미친 듯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나는 아버지가 교회로 가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말릴 힘도 없었고, 말릴 틈도 없었다. 아니, 말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미처 못 했다. 나는 자리에 누운 채 대문 밖으로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거친 발소리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그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다 그려볼 수 있었다. 그냥 저절로 떠올랐다. 화가 날 때 아버지는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위인이다. 그때만큼은 아무도 못 말릴 다혈질의 괴물로 변한다. 벌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예배실에 들어서자마자 어쩌면 찬송가를 부르던 교인들 들으라고 힘껏 고함을 쳤을지도 모른다. 이놈의 여편네가 자식이 아파서 사경을 헤매는데 여기 와서 노래나 쳐 부르고 앉았어?

아버지의 고함 소리는 크다. 쩌렁쩌렁 울린다. 깡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할 지경으로. 집안 어른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식으로 고함을 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할머니는 내가 워낙 어릴 때 세상을 떠나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할아버지는 작은 몸집만큼이나 목소리 자체가 굵직한 통 소리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모르는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도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곧잘 화를 내곤 했을까. 그걸 보고 배운 것일까. 어떤 유전자가 그런 고함을 치게 만드는 것일까. 아버지가 화를 내며 소리 지를 때는 호랑이가 깊은 숲 속에서 포효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굶주려 배는 고픈데 뜻대로 먹이가 잡히지 않아 잔뜩 속이 상한 호랑이다. 어찌 보면 짐짓 그렇게 흉내를 내는 것도 같다. 그러다가 숫제 버릇이 되어버린 걸까.

아버지가 한 번 그렇듯 고함을 치기 시작하면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야 한다. 몸속에 잔뜩 고인 분노의 찌꺼기를 남김없이 밖으로 쏟아내야 끝나는 일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고, 그래서 천만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참기 힘든 고역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비는 수밖에 없다. 그날 아버지 손에 말 그대로 질질 끌려온 어머니는 밤새 내 머리맡에 앉아 조용히 나를 간호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앓는 중이었는데도 그런 앞뒤 정황들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나는 어린 마음에도 제법 걱정이 되어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아버지의 행패는 거기서 그쳤다. 집에 와서까지 어머니를 잡도리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끌고 집으로 오는 동안 방금 교회 사람들한테 추태를 보인 것에 대해 스스로도 어느 만큼은 자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벌써 아차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내친걸음이었을 테니까. 그게 아버지라는 위인이다.

한데, 지금 아버지는 조용하다. 적어도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일 따위는 없다. 이상하다. 역시 늙은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변한 것일까. 호랑이는 늙어도 호랑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던 흉맹한 본성이 언제 느닷없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실은 조마조마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누워만 있어야 하는 신세고, 발광하는 아버지를 말릴 힘이 지금은 없다. 이렇게나 몸에 기운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연료가 거의 바닥난 낡은 자동차 같다. 액셀러레이터를 아무리 밟아도 기운 껏 앞으로 나아갈 턱이 없다. 콩팥이 에너지원이라는 사실이 뼈저리다. 중요한 엔진 하나가 고장 난 셈이다. 힘이 날 턱이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내 주치의는 친절했지만 상세하게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아마 학생들한테도 그런 식으로 대강의 설명만 해주고, 나머지는 각자 스스로 교재를 읽고 이해하여 내용을 익히라고 시키는 유형이지 싶었다. 어쩌면 교육적인 효과는 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환자한테는 그저 친절하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 환자는 학생이 아니다. 더군다나 남이 아니라 자기 몸이다. 환자가 자기 몸의 증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치료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병을 앓는 환자 처지로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마당에 의사한테 이것저것 꼬치꼬치 따져 묻게 되지는 않는다. 설명해 주면 고맙지만, 설명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항의할 용기는 없다.

말하자면 콩팥은 피를 걸러내는 장기예요. 그래서 몸에 필요한 것은 남기고, 필요 없는 것은 바깥으로 내보내는 거지요. 그걸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겁니다. 의사는 살짝 따분하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상세한 설명은 아니었어도 명쾌한 설명이기는 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전공의한테서 들을 수 있었다. 이쪽은 열성이 조금 지나치다. 언제나 그랬다. 어쩌면 그걸 자기 학습의 과정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훈련이요 반복 학습이다. 하여 환자로서 나는 그 젊은 의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조금 피곤해진다. 쓸데없는 설명이 많다. 나는 이미 다 알아들었는데,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했고, 충분히 이해도 했는데, 그는 뭐가 더 부족하다는 것인지 설명을 멈출 생각이 없다. 거듭 확인하기까지 한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으셨죠? 자꾸 이렇게 재우쳐 묻는다. 나는 속절없이 대답해야 한다. 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그래서 빈혈이 생겼다는 거지요? 신장이 깨끗한 피를 만들어 몸속으로 보내줘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그렇다는 거지요? 그래서 피가 신장에 고이고, 그 탓에 신장이 자꾸 비대해지며, 나아가 단단해지는 경화현상까지 벌어진다는 거지요? 이렇듯 보기 흉하게 배에다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도 거기에 고이는 피를 밖으로 빼내기 위해서고요.

그래도 그런 설명 덕분에 내 몸의 증상을 나는 확실히 파악한다. 더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런 것까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까지 하다.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점에서는 경험 많은 주치의인 교수가 역시 사려 깊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환자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 알면 오히려 걱정만 더 늘어날 사항들이 무엇인지 가릴 줄 아는 것이다. 경험자답다. 이게 교수와 전공의의 다른 점이다. 나는 자꾸 둘을 견주어보게 된다. 그러면서 이내 둘 각각의 필요성을 이해한다. 둘 다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를 보완해야 균형이 이루어진다. 환자도 마찬가지다. 경험 많은 환자와 경험 없는 환자. 나는 어쨌거나 후자 쪽이다. 그렇다면 다소곳이 배워야 한다. 그게 바른 자세다. 그렇게 마음을 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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