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몸과 약, 그리고 밥
7. 몸과 약, 그리고 밥
이렇게 오래도록 계속 약을 먹어본 적이 없다. 날마다 끼니때마다 무슨 식후 디저트를 먹듯 어김없이 똑같은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능을 발휘하는지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먹지 않을 경우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알고 있다. 그 두려움이 나로 때마다 강짜 부리지 않고 다소곳이 약을 먹게 한다. 약에도 중독이라는 것이 있을까. 약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내성이라는 것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래서 마침내 약이 소용없게 되는 때가 올 수도 있을까.
자꾸 꿈을 꾼다. 꿈이 많아졌다. 처음 얼마간은 없던 현상이다. 눈을 뜨면 어떤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꿈에 대한 기억은 연기처럼 이내 사라진다. 잡을 수 없다. 그걸 잡아둘 수 있을 만한 기력이 없다. 한데도 깨고 나면 까닭 모를 안타까움으로 한동안 가슴이 저리다. 그 안타까움으로 미루어 꿈의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이른 새벽이다. 눈이 뜨인다. 창밖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눈을 뜨고 나서 비로소 새벽임을 알아차렸는지, 새벽임을 알아차린 것과 동시에 눈을 떴는지, 아니면 새벽이 되었다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나서야 눈을 뜬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좀 더 자고 싶은데, 좀 더 자야 할 것 같은데 몸은 벌써 성급하게 저 혼자 알아서 각성한다. 내 뜻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긴 내 뜻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망가지지 않았는가. 몸한테 나는 무시당했다. 어쩌면 앙갚음일까. 나는 몸한테 복수를 당한 게 아닐까. 내가 자기를 함부로 취급한 데 대하여 앙심을 품은 것일까.
몸을 혹사한 것은 사실이다. 오래도록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뜻이 아니다. 충분히 쉴 수도 없었고, 게으름 피울 수도 없었다. 그저 일하고 또 일했다. 학생이 공부하고 또 공부하듯이.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았는가. 지금도 그렇게들 살고 있고. 학교가, 세상이, 회사가 나를 그렇게 부려 먹었다. 나는 순종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 몸은 자기를 귀하게 대접하지 않았다고 나한테 항의하고 있다. 실력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몸은 자기 뜻을 관철한 셈이다. 나는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엄밀히 따지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격이 아닌가. 아무리 세상에 거저는 없다지만,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내가 만든 세상이 아니다. 나는 책임이 없다. 억울한 것은 내 쪽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억울한 기분이 든다. 좋지 않다. 소용없는 생각이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래도 잘못은 나한테 있다. 내 잘못이다, 어디까지나. 어찌 되었든 나는 내 몸을 잘 지켰어야 했다. 어찌 되었든 부모는 자식을 잘 지켜야 하는 것처럼. 나는 그러지 못했다. 바로 그것이 내 죄다. 그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몸을 지켰어야 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식을 지키듯이 나는 나 자신을 고이 다루며 보살폈어야 했다. 정성껏 대접했어야 했다. 따지고 보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러기로 마음만 먹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야근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험하고 거친 음식도 함부로 먹었다. 그나마 제때 먹지도 못했다. 그래 놓고는 충분히 쉬어주지도 않았다. 나는 몸을 너무 함부로 대했다. 자업자득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게 억울하다면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내 몸을 위해서 나는 좀 더 영악하게 굴었어야 했다. 몸은 정직하다. 성실하다. 몸은 할 만큼 했다. 버틸 만큼 버텨주었다. 나는 타고난 몸의 역량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몰아붙였다. 어리석었다. 몸이 여태까지 견뎌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이제는 내가 몸한테 보답할 차례다.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몸이 나를 다시 호의적으로 대해주기를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 그게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눈을 감는다. 그것 말고는 따로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목이 마르다. 눈을 감은 채로 손만 뻗는다. 어머니가 작은 생수병을 옆에 갖다 놓은 것을 알고 있다. 그걸 더듬어 잡는다. 뱃가죽이 조금 당긴다. 아픈 느낌은 아니다. 이제 통증은 확실히 둔해졌다. 자꾸 쓰다 보면 날 끝이 마모되는 식칼처럼 통증은 하루하루 그 예리함을 잃어 간다. 그게 느껴진다. 진통제의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몸이 복강을 뚫어놓은 상태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적응력이 놀랍다. 참 무던하다. 바로 이 무던함으로 몸은 그동안 나한테서 받아온 소홀한 대접을 묵묵히 참아냈을 것이다. 문득 애처롭다.
물이 미지근하다.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냉장고까지 걸어갈 힘이 없다. 그냥 마신다. 갈증은 있는데, 식욕도 없고, 공복감도 없다. 공복감이 없기 때문에 식욕도 없는 것인지, 식욕이 없기 때문에 공복감도 없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 것이 너무나 많다. 병원에서는 그 누구도 내가 장차 이러저러한 증상들을 겪을 것이라고 일러주지 않았다. 모든 게 낯설다. 내가 알아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고 적응해야 한다. 이 정도는 환자 스스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까. 의사들은 환자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과 알려주지 말아야 할 것, 또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 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환자들은 궁금하다. 그게 환자의 마음이다. 아파보니 알겠다. 내 몸의 낯선 반응 한 가지를 새로 마주할 때마다 불안하다.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얼른 가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식사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더 먹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다. 입맛이 없어 밥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지 못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위의 크기 자체가 줄어든 느낌이다. 몇 술 뜨지 않았는데 금세 배가 찬다. 양껏 먹어 배가 부른 상태와는 또 다르다. 포만감이 아니다. 더 먹었다가는 탈이 날 것만 같은 느낌. 내 위가, 내 몸이 견디지 못하리라는 느낌. 위태롭다. 식욕이 식욕을 낳고, 그 식욕이 또 다른 식욕을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그 흐름이 끊겼다. 교란되고 있다. 양껏 먹을 수도 없고, 양껏 먹고 싶지도 않다. 먹지 않으니 기운이 날 턱이 없다. 다만 생기는 것은 갈증이다. 물을 자꾸 마시게 된다. 어쩌면 물이 식욕을 앗아가는 구실을 하는 걸까. 물을 마시면 조금은 마음이 안정된다. 몸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그게 좋다. 뭔가 몸속에 있는 나쁜 것들을 물이 씻어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간 온갖 안 좋은 것들로 채워온 내 몸을 맑은 물로 깨끗하게 비워내고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물에 자꾸 손이 간다. 아무 맛도 못 느끼겠는데, 입에 맞는 것은 지금 물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약을 복용하려면 먼저 밥을 먹어야 한다. 공복에 먹는 약은 해롭다. 효능도 떨어진다. 몸이 약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식후 삼십 분이 기준이다. 듣자 하니 여기에 명확한 의학적 근거는 없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처방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즈음이 되어야 몸이 약을 또 다른 밥으로 착각해서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공복에 먹는 약은 몸한테 밥이 아니라 이물질이다. 몸이 스스로 약을 거부한다. 먹어봤자 소용없다. 그러니 나는 약의 효능을 지키기 위해서 억지로 밥을 먹는 셈이다. 그런 밥이 맛있을 까닭이 없다. 때로는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약의 양과 밥의 양이 서로 비슷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약을 먹기 위해서는 물을 마셔야 한다. 물과 함께 약을 삼킨다. 그건 이미 또 다른 한 끼의 식사다.
어머니의 안타까움이 눈에 밟힌다. 좀 더 먹여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잘 먹고 어서 기운 차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아들한테서는 쉽사리 그럴 기미가 엿보이지 않는다. 이것저것 만들어주고 싶은데, 아들은 아무거나 먹지를 못한다. 적어도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간을 세게 하면 안 된다.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은 죄다 피해야 한다. 짜서도 안 되고, 매워서도 안 된다. 단백질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지금 내 신장은 그런 양분들을 제대로 처리해 낼 능력이 많이 모자란다. 어머니는 음식솜씨를 뽐낼 여지가 거의 없다. 잘 먹일 길이 없다. 나는 그런 어머니 앞에서 끼니를 거르는 일만은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어머니가 차린 밥상이다. 나는 한 술이라도 떠야 한다. 뜨는 시늉이라도 한다.
어머니는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먹어야 했던 병원 밥을 흉내 내고 있다. 우선은 그걸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해한다. 밥과 국, 거기에 생선을 곁들인 몇 가지 나물 반찬. 겉보기로는 평범한 가정식이다. 하지만 맛은 신기하리만큼 죄다 똑같다. 간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식사도 치료 과정의 일부다.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 나는 저염식 환자로 분류되었다. 소금은 내 신장에 독이나 다름없으니까. 동물성 단백질도 마찬가지다. 해서 고기대신 생선이 나왔다. 그것도 최소한의 영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짧게 한 토막. 그나마 아무런 간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굽거나 삶거나 튀겼다. 나물들은 기름간만 되어 있었고. 그러니 반찬에서 나는 거의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다 평소에 먹어본 것들이었다. 맛을 기억하고 있는 반찬들. 그 맛을 기대하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혀에 얹으면 나는 이내 실망하고 만다. 기억과 현실의 괴리. 시각과 미각의 충돌.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재료의 촉감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술받은 뒤로 입맛이 뚝 떨어진 터에 간을 하지 않은 식사를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도저히 씹어 삼킬 수 없었다. 그런 내 입에 어머니는 억지로 밥을 밀어 넣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먹어야 산다. 먹어야 일어난다. 나는 아직 젓가락질에 서툰 어린아이처럼 어머니가 떠 넣어주는 밥과 반찬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아니, 씹었다. 그리고 삼켰다. 그래도 언제나 반쯤은 남겼다. 먹다 보면 도저히 더는 입에 댈 수 없는 순간이 왔다. 더 먹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이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는 다급했을 것이다.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을 테니까. 역시 나 몰래 평소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아온 것일까. 격조했던 사이치고는 서로 오가는 눈빛이나 말투나 거동이 자연스럽다. 아내는 그리 붙임성 있는 여자가 못 된다. 예의 바르고 착하기는 하지만, 그건 붙임성과는 다른 자질이다. 그런 아내가 남편 몰래 시어머니하고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아왔다니, 마땅히 놀라야 할 터인데도 내 가슴은 이상하리만큼 담담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그래도 마음속 한 귀퉁이에 조금은 있기 때문일까. 어쨌든 아내는 뜻하지 않은 난국의 해결책을 찾아낸 셈이다. 아내를 탓할 구실이 없다. 그럴 주제가 못 된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언젠가는 닥칠 일. 나는 마음속으로 그걸 기대하고 준비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토록 담담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