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194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94

by 김정수

CA966. 이마무라 쇼헤이, 〈우나기〉(1997)

그(야쿠쇼 코지)가 우나기(뱀장어)와 함께 있을 때는 스스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자처한 또는 자처하지 않은 온갖 수난을 모조리 겪고 나서야 비로소 우나기를 놓아줄 수, 또는 떠나보낼 수 있었고, 자유를 얻었다. 마치 〈캐스트 어웨이〉(2000, 로버트 저메키스)에서 톰 행크스가 자기의 분신과도 같았던 배구공 윌슨과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본디의 자신으로 우뚝 서서 진정한 인간관계의 망 속으로 들어갈(올) 수 있었듯이. 그 관계망을 전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었듯이. 그가 우나기를 방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그가 본디의 자신을 되찾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본디의 자신을 찾았으니, 이제부터 그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마침내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그 한 가지 증거다.


CA967. 잭 스나이더 & 조스 웨던, 〈저스티스 리그〉(2017)

‘저스티스(Justice)’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곧바로 ‘인저스티스(Injustice)’가 호명되어 나온다는 것은 세상의 기본 이치다. 그러니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저스티스’ 리그가 있다면 ‘인저스티스’ 리그도 당연히 있는 것이 기본값이다. 이 영화의 아이러니는 바로 그렇듯 저스티스 리그의 승리 뒤에 그 결괏값으로 인저스티스 리그가 성립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꼭 속편을 위한 떡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CA968. 곽경택, 〈소방관〉(2024)

그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불이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다 저마다의 싸움을 벌이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불은 그 맨 나중의 적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구하려, 무엇인가를 지키려, 무엇인가를 위해서 그들은 싸운다. 그들은 불을 끄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을 끄는 일은 그들에게 맡겨두고 그들을, 그들의 삶을, 그들이 지키려는 것을 위해서 대신 또는 함께 싸워줘야 한다. 그래야 불이 꺼진 곳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CA969. 양우석, 〈대가족〉(2024)

영어 제목인 ‘About Family’가 좀 더 사려 깊다는 느낌. 왜냐하면, 이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대(大)가족이 아니라, 그저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대안 가족’이라는 명칭조차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런 것이 더는 ‘대안’이 아닌 시절을 우리는 바야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유전자 검사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무의미했던 것이다.


CA970. 이명세, 〈개그맨〉(1989)

한국영화 낭만주의 시절의 명작. 백일몽의 영화. 보고 있는데도 그리운 영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

매거진의 이전글My Cinema Aphorism_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