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209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09

by 김정수

CA1041. 조성희, 〈승리호〉(2021)

꽃님이는 말한다. “우주에서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대요. 우주의 마음으로 보면 버릴 것도 없고 귀한 것도 없고요. 다 자기 자리에서 다 소중하다.” 그렇다면 지구에서는 위도 있고, 아래도 있으니, 지구의 마음으로 보면 버릴 것도 있고, 귀한 것도 있어, 결국 다 자기 자리에서 다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 되나? 그런 곳이 지구인가? 그렇다면 지구가 왜 지옥 같은지 알 수 있을 법도 하다. 따라서 지구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우주의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것이 애초에 있었다면. 완전히 없어져서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면 새로 만들어서라도. 하지만 지구의 마음을 우주로 그대로 가져간다면 그 우주도 그 물리적인 상태와는 별개로 역시 지옥이 되고 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지구냐, 우주냐가 아니라, 마음 그 자체일 것이다.


CA1042. 스파이크 리, 〈버스를 타라〉(1996)

감독은 다양한 입장과 처지에 놓인 흑인들을 한 데 모아두고 여러 가지 테마에 관한 여러 겹의 시각차를 드러내 보이도록 함으로써 그저 맹목적인 저항이나 부정적인 시각만이 흑인해방을 위한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조심스럽게 강조한다. 스파이크 리의 흑인들이 얼마나 성숙해졌는가를 엿볼 수 있는 영화. 물론 이 조심스러움과 성숙이 그저 순응의 태도이기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CA1043. 존 페이슨, 〈죠의 아파트〉(1996)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소설 《개미》를 떠올려 보면, 개미뿐만이 아니라 바퀴벌레가 지구의 진짜 주인인지도 모른다는 상상력. 그리고 환경보호론. 바퀴벌레는 인간이 더러워하는 것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맡는 존재라는 통찰.


CA1044. 멜 브룩스, 〈영 프랑켄슈타인〉(1974)

괴물은 창조자에게 정력을, 창조자는 괴물에게 지성을 주었으니, 수지타산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그러니 약혼녀는 괴물과 결혼하고, 비서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결혼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패러디가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양차 세계대전 사이인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 만들었던 원작을 농락할 정도로 괴력을 발휘한 영화.


CA1045. 임순례, 〈세 친구〉(1996)

절망은 있지만, 희망은 없는 이야기. 감독이 영화의 마지막을, 청력을 상실한 ‘무소속’(현성)이 정처 없이 산동네 골목길을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낸 것은, 삶의 희망 없음의 진상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섬세’(정희석)가 동성애자로 변모해 가는 과정과 ‘삼겹’(이장원)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 쉴 사이 없이 먹는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감독의 재능이 발휘된 대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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