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16
CA1076. 마린 고리스, 〈안토니아스 라인〉(1995)
여자의 가계(家系)를 이야기하는 데 희극의 제스처가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리얼리티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만으로 이루어진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여자들이 끊임없이 여자를 낳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 결혼이라는 제도로 동참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소외 또한 끊임없이 조장되어야 한다. 이 길고도 거대한 불협화음 속으로 여자들은 여유와 호방한 웃음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분히 위악적이다. 그러니 그들의 삶이 자유롭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카메라의 속임수일 것이다. 하지만 의문 한 가지는 여전히 남는다. 남자들의 가계가 그렇듯 여자들의 가계 또한 신(神)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CA1077.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야수의 날〉(1995)
이 영화를 우스꽝스럽게 찍으면 어떻게 될까. 〈오멘〉(1977, 리처드 도너)의 코미디스러운 패러디? 세기말의 강박증에 시달리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일침이 이토록 유머러스할 수 있다면 다음 세기에 대한 희망을 품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CA1078. 알프레드 히치콕, 〈협박(Black Mail)〉(1929)
히치콕의 첫 유성(有聲)영화. 소리와 화면을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솜씨에서 속절없이 우리는 미래의 대가를 짐작한다.
CA1079. 잭 숄더, 〈히든〉(1987)
신체를 강탈당한, 그래서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이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숨가쁘게 이어지는 영화의 첫 부분은 심각한 사회병리학적 주제 의식을, 거의 불필요하게, 강렬히 드러내 보임으로써 〈터미네이터〉(1984, 제임스 카메론)를 넘어선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터미네이터〉를 지나치게 많이 닮는다. 그러나 저예산 SF영화의 또 하나의 모범 답안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을까. 그리고 카일 맥라클란의 마네킹 같은 포커페이스에 담긴 기묘한 우수의 표정―.
CA1080. 레니 할린, 〈롱 키스 굿나잇〉(1996)
지나 데이비스의 악몽 시퀀스는 분명 레니 할린이 〈나이트메어 4: 꿈의 지배자〉(1988)에서 진작에 갈고닦은 솜씨다. 한데, 현란한 액션들이 이 시퀀스가 지닌 공포 이미지의 강렬함과 벌인 대결에서 정말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