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244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44

by 김정수

CA1216. 로렌스 캐스단, 〈우연한 방문객〉(1988)

가슴 깊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어 삶에 대한 의욕 일체를 잃어버린 사람의 공허하게 꺼져 들어간 눈빛. 이걸 표현하는 윌리엄 하트의 연기는 눈부시다. 캐서린 터너의 연기는 〈보디히트〉(1981)의 악녀 이미지 그대로인데, 놀라운 것은 지나 데이비스의 연기. 그것은 사람이 성격에 따라 똑같은 상처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CA1217. 크리스 누난, 〈꼬마돼지 베이브〉(1995)

배우는 반드시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일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역설하는 영화. 이것은 이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되어 있다. 이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배우가 꼭 한두 명씩은 등장하는 영화를 억지로 참고 보아야 하는 관객으로서는 퍽이나 매력적인 주장 아닐까.


CA1218. 끌로드 밀레, 〈귀여운 여도적〉(1988)

소녀 판 〈400번의 구타〉(1959, 프랑수아 트뤼포)―. 실제로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 영화 시나리오의 공동 집필자다.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반항의 수단으로 도둑질을 택한다는 것에는 도대체 어떤 심리적 기원이 있는 것일까. 주연 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은희경의 장편소설 《새의 선물》의 화자인 소녀와 놀랄 만큼 많이 닮은 캐릭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이는 다 똑같다는 것. 그렇게 똑같던 아이들이 커가면서 왜 달라질까. 아니, 왜 달라져야만 하는 걸까. 이 ‘달라짐’을 ‘성장’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하지 말기를―.


CA1219. 스탠리 큐브릭, 〈영광의 길〉(1957)

승전의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후방의 최고 지휘관인가, 전방의 일선 장교인가, 아니면 전선 맨 앞의 사병들인가. 하지만 영화는 처음에 던져놓은 이 질문에 끝내 답하지 않는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역시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그리고 커크 더글라스의 ‘점잖은’ 연기―.


CA1220. 레오스 카락스,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

새로이 창조된 강렬한 시각 이미지는 시간이 풍화시킬 수 없다는 진리를 입증하는 영화. 소년이 소녀와 만나는 것은 천지개벽과 맞먹는 사건이다. 그리고 영화는 단 한 번 피를 보여준다. 흑백 화면에서 소녀의 옷 위로 스며 나오는 ‘검은’ 피는 기적처럼 빨갛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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