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256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56

by 김정수

CA1276. 니콜라스 레이, 〈쟈니 기타(고원의 결투)〉(1954)

색채 이데올로기의 절묘한 구현. 장례식 예복의 검은색이 악을 상징하게 되는 그 치환의 과정은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고원의 결투’는 1958년도 국내 개봉 제목이다.)


CA1277. 모리스 피알라, 〈사탄의 태양 아래〉(1987)

똑같이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원작을 토대로 한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가 사색가의 이야기라면, 이 영화는 행동가의 이야기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신이 모욕받는 것을 끊임없이 목도하고 괴로워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진지한 대사가 어울리는, 드물게 보는 종교적 서사. 행동가로서의 사제 제라르 드파르디유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 몸에 가혹하게 채찍질을 가한다. 그것이 때로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은 그의 연기가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진짜로 진지하기 때문이다.


CA1278. 뤽 베송, 〈그랑 블루(감독판)〉(1988, 2013)

러닝타임 168분. 새로 추가된 부분에서 자크(장 마르크 바)는 웃어야 할 때 웃을 줄 아는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 담긴 삶의 모습은 더욱 풍부하고 유머러스하다. 엔조(장 르노)와 자크 사이에서도 경쟁의식보다는 애정이 더 중요한 감정으로 취급된다. 서사도 그에 따라 구 편집본과 견주어 상당히 밝고 편안한 정조로 되어 있다.


CA1279. 알란 파커, 〈결혼의 위기(Shoot The Moon)〉(1982)

무려 네 자녀를 둔 부부가 별거하는 이야기. 이런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결말이다. 마지막에 광태를 부리다 아내의 정부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쓰러진 남편은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민다. 아내는 서 있고, 남편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쓰러져 있는 마지막 장면의 미장센은 모든 의미를 ‘기하학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한 쪽도 남편이며, 별거를 선언하고 집을 나간 쪽도 남편이다. 그리고 벌거 상태에 심각한 문제를 느낀 쪽도 남편이며―이 경우 아내는 별거를 행복하게 받아들여 가는 중이므로 누가 먼저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별거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손을 내민 것도 남편이다. 물론 남편이 못 견딘 것은 별거 상태 자체가 아니라, 그 별거가 야기한 결과 때문이다.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 그 남자와 자기 자녀들이 가까이―거리 상으로든 정서적으로든―지내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자기가 떠난 그 자리에서 즐겁게 지낸다는 사실이 유발한 심리의 소용돌이를 남편은 견디지 못한 것이다. 영화의 열쇠는 아내(다이앤 키튼)의 마지막 표정,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쓰러져 있는 남편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에 놓여 있다. 여기에서 다이앤 키튼 최고의 표정 연기가 펼쳐진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문제를 느끼고, 급기야는 별거 생활에 만족을 느끼게까지 되었는데, 이제 다시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그 심연과도 같은 절망을 그 표정은 남김없이 드러낸다. 가부장제의 강압스러운 응집력이 여성에게 무시무시한 족쇄로 작용한다는 이 통찰의 깊이! 여성의 이 절망을 감독은 다이앤 키튼의 표정 하나로 가공할 만한 등신대의 실감으로 표현해 낸다.


CA1280. 존 맥티어넌, 〈에덴의 마지막 날〉(1992)

개미가 인류를 암(cancer)으로부터 구원할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착상의 기발함. 하지만, 이 영화는 마이클 앱티드의 〈정글 속의 고릴라〉(1988)와 비슷한 정도의 실패작이 아닌가 싶은 피할 수 없는 느낌. 드라마와 오락 사이에서 서성이는 것은 역시 현명한 선택이 아닌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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