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263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63

by 김정수

CA1311. 티모 타잔토, 〈노바디 2〉(2025)

〈테이큰〉(2008, 피에르 모렐)에서 〈존 윅〉(2015, 데이비드 레이치)을 거쳐 마침내 〈노바디〉(2021, 일리야 나이슐러)로―. 리엄 니슨에서 키아누 리브스를 거쳐 밥 오거텐트로―. 〈테이큰〉과 〈존 윅〉의 그들은 모두 ‘섬바디’였지만, 이 영화 〈노바디〉의 그는 문자 그대로 ‘노바디’다. 심지어 ‘노바디’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지극히 만족한다. 이 차이가 이 영화 〈노바디 2〉를 〈노바디〉의 부자(父子) 액션에서 유쾌한 가족 액션 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유쾌한’이라는 형용사에 현혹당하면 곤란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가족’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에 ‘유쾌한’이니까. 〈테이큰〉의 브라이언 밀스(리엄 니슨)는 이혼한 남자고, 〈존 윅〉의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아내와 사별한 남자인데, ‘노바디’인, 또는 ‘노바디’이고자 하는 허치 맨셀(밥 오거켄트)은 이혼하지도 않았고, 사별하지도 않았다. 연로하신 아버지를 포함한 그의 5인 가족은 튼튼하고 건강한 가족애로 무장되어 있다. 아내는 늘 저지레를 치는 남편을 변함없이 굳게 사랑하며, 나아가 지지한다. 이런 가족이기에 ‘유쾌한’이라는 형용사를 가질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겠지.


CA1312. 이장호, 〈명자 아끼꼬 쏘냐〉(1992)

카메라가 시종일관 어딘가 모르게 들떠 있는 듯한 느낌인 것은 감독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사이에서 갈등한 탓이 아닐까. 아니, 그 갈등을 내면에서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채로 이 서사, 한 여인의 일생 전체를 다루는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 아닐까.


CA1313. 알프레드 히치콕, 〈암호명 토파즈〉(1969)

히치콕이 구성하는 화면 또는 화면의 연쇄에는 관객이 관찰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또는 관찰을 해야겠다는 생각 또는 욕망이 들게 만드는 공백 같은 것이 있다. 아마 이 공백에 히치콕 영화의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 터이다.


CA1314. 알프레드 히치콕, 〈찢어진 커튼〉(1966)

히치콕은 인물의 몸짓, 동작, 행동을 중시하는 미국 문학의 전통에 가장 충실한 감독이 아닐는지. 이것이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표정 연기가 기계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다. 동작은 중요하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다는 원칙. 그래서 그의 영화는 수학적이다. 외딴집 시퀀스는 동선의 정확한 연결이 돋보이는 이 영화의 백미―.


CA1315. 로만 폴란스키, 〈실종자(Frantic)〉(1988)

원제를 ‘실종자’라는 어감을 살려서 번역한다면 ‘실성자’ 정도로 하면 될까. 주인공이 해리슨 포드라는 점은 그가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을 것이라는 믿음을 관객에게 강제한다. 적어도 얼마간은. 그래서 이 영화는 처음부터 절반쯤 실패한 채로 출발한 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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