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 리뷰
그가 오기를 바라지 않고 기다리는 일이 가능하다면 나는 그 일을 했던 것이고, 사실 오늘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이 내게는 본성이 되었고, 기다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이미 오래전부터 괴롭지 않다. (12)
주인공은 백 살이 다 된 할머니다. 사실 자신의 나이가 얼마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정확한 나이조차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한 남자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인물들의 독특한 직업은 소설을 매력 있도록 하는 제1요소이다. 주인공은 한때 박물관의 공룡, 특히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연구하는 중년의 동독 여성이었다. 그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프란츠라는 기혼 남성을 운명적으로 만나 일생의 사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녀 또한 남편과 딸이 있었다. 프란츠가 기혼자인 것과, 주인공에게 딸과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은 프란츠를 사랑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장벽이 되지 않는다. '내가 프란츠와 만난 후에 남편은 눈에 띄지 않게 내 인생에서 사라졌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슬픈 짐승>의 주인공은 늘 이런 식으로 인과관계의 공란을 자신의 애매한 기억력으로 충당한다.
공룡 연구가로서, 그녀는 '플리니 무디의 정원'으로 가길 소원해왔지만 그 꿈을 성취하지 못해 왔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왔음에도, 그녀는 정원에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룬다.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우리의 상상력과 기대를 충족해주는 것이 그곳에 실제로 있는가이다. 장벽은 그 너머를 상상하도록 우리를 자극하지만,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곳에 있는 것은 그저 일상적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거나,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 결국 사실에 대한 '반사실'만이 우리를 안도시킨다.
공룡이 그녀에게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라면, 딸이 가져온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친족'인 거북은 경멸의 대상이다. 그녀에겐 죽어버린 것들만이 영광으로 남는다. 떠나간 것들만이 그리워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생각은 그녀의 직업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오물 자국을 남기며 카펫 위를 지나가는 거북과 닮아있다. 그녀의 내연남이 된 프란츠 또한 그녀와 닮아있다. 개미 연구가인 프란츠는 개미를 대상으로 온갖 실험을 할 수 있지만, 자기가 할 수 없는 실험을 원한다. 그들은 현실을 떠나 불가능을 희구하는 것이 인간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프란츠가 나를 떠나고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그를 기다리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내 사랑과 융화하여 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내 사랑과 나를 구분하지 않으며, 그 이후로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내가 원했던 것이다. (26)
그녀에겐 사랑도 이상화될 때 가장 아름답다.
주인공의 생각은 독일에서 있었던 여러 이야기들로 강화된다. 중년에 만난 에밀레와 지빌레는 잠깐의 불꽃이 튀지만, 이내 에밀레는 통일 독일을 위해 헌신하기로 마음먹으며 지빌레와 단절된다. 지빌레는 사랑의 종말에 대한 책임을 기이한 시대의 탓으로 돌린다. 자신이 그것의 귀책사유인지 묻는 것은 아마 가장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에밀레는 얼마 안 되어 사망하고, 장례식장엔 에밀레의 전 부인인 '바그너'여사가 주인공이 된다.
지그린데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상황과 매우 닮아있다. 지그린데는 남편의 첫사랑이었던 레나테에게 남편을 보내고, 다시 돌아오길 기다린다. 주인공은 레나테에 자신을 대입시키며, 이를 공정하다고까지 느낀다. 그리고 죽음이 지그린데 이야기의 결말에 어느 정도의 작용을 한다.
프란츠의 아버지가 저지른 불륜의 도식이 프란츠에게 그대로 대물림되는 상황 또한 기묘한 연출이다. 결국 프란츠와 주인공 모두 불륜으로 인한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그것을 행하고, 어느 정도 옳은 결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지점은 나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은 클라이스트의 희곡 <펜테질레아>의 대사이다. 주인공은 사랑을 소재로 한 비극들에 대해 명상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49)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드러나는 작품의 동형성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는 외재적 상황과 금기는 사랑을 지고지순하게 만든다. 그들은 언제나 금기를 깬다. 그리고 죽음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해 그들의 사랑에 불멸성을 부여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위대한 개츠비'도 여기에 슬쩍 발을 얹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르페우스 이야기 또한 이러한 모티프를 가진다. 하지만 주인공은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불멸의 사랑을 죽도록 노래로 찬미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레아’도 잔혹하긴 하지만 나름의 순정이 있다. 아마존의 여왕 펜테질레아는 미르미돈의 수장인 아킬레우스를 사랑하지만, 오해로 인해 그를 죽이고 결국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불멸의 사랑을 획득한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이라는 대사는, '그대를 차지하기 위해 함께 죽는 것'으로 바꿔도 여전히 유효하다.
교화된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다. 그는 개를 사서 개를 사랑한다. 개가 죽으면 개를 새로 사서 그 개를 다시 사랑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쉬웠다. 프란츠를 만나기 전 나는 그 영원한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사랑했다. (91)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하면서도, 불멸성을 부여하는 방법은 실재하는 대상을 소거하고 기억만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니체를 제외한다면, 독일인들은 모두 바그너를 좋아할까? 이에 대해 답변을 할 순 없지만, 저자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슬픈 짐승>엔 바그너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꽤 있다. 우선 액자식 이야기에 나타나는 '바그너' 여사가 그렇다. 두 번째론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바그너는 중세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바 있다. 알리의 개 이름인 '파르지팔'도 바그너가 각색한 오페라 중 하나이다. 오페라를 좋아한다면, 이런 설정들이 재밌게 다가올 것이다.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을 각색할 당시 쇼펜하우어에 심취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는 비극적 요소가 있으며, 생은 끝없는 열망의 연속이다. 그의 말을 긍정한다면 인간의 열망은 본질적으로 결코 채워질 수 없다.
파르지팔의 아들인 '로엔그린'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이 역시 바그너의 오페라 중 하나이다. 백조를 타고 다니는 기사의 이름이기도 한 '로엔그린'의 서사는 주인공이 언급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와 많이 닮았다. 위험에 빠진 여성을 방랑기사가 구해주는 로엔그린의 구조는 중세의 기사도 문학의 변용에 해당한다. 다만 오페라 '로엔그린'에서는 금기를 설정하는 주체가 로엔그린 당사자이고 금기를 깨는 쪽은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양측이 모두 살아남는다는 점이 오르페우스 이야기와의 차별점이다. 금기를 어겼기에 로엔그린은 자신이 구한 여성을 떠난다.
<슬픈 짐승>의 주인공은 명시적인 금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프란츠에게 한 행동은 암묵적인 금기를 수면 위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레짐이다. 이 대목에선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 떠오른다.
그 앞에서 스탈린 찬가를 불렀을 때부터, 프란츠가 내게 배반의 혐의를 두었던 것처럼, 내 결혼생활이 슬며시 눈에 띄지 않게 해체되는 것을 보고 그는 무엇보다도 그 기이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기독교식 품성이 몰락한 결과로 받아들이려 했다. (152)
<슬픈 짐승>에서 '슬픈'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Triste'로 쓰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Tristan) 또한 이 단어의 변용에서 온다. 소설 속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언급된 것을 보면, 이러한 연관성을 저자가 몰랐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주인공이 최초에 가졌던 사랑의 믿음은 종국엔 자기 자신에 의해 전복되고 신화의 원형이 회귀한다. 금기는 피할 수 없고, 사랑은 현세에서 불멸을 획득하지 못한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Hubris)이기에 신의 분노를 산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린 슬퍼지는 것이다.
Frisch weht der Wind
바람은 가볍게
Der Heimat zu
고국으로 부는데
Mein Irisch Kind
에란의 우리 님
Wo weilest du?
그대 어디서 머뭇거리나요?
<Tristan und Isolde>
불륜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쓴 것은 개인적으로 이 책의 아쉬운 점이자 매우 실망스러웠던 부분이다. 자유결혼이 거의 불가능했던 중세시대는 진작 지났고, 인간 삶의 비극을 드러내는 소재는 도처에 널리지 않았나. 양차대전 전후의 독일에서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책을 읽는 동안, 어쩔 수 없는 깊은 한숨이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