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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yaya Dec 11. 2019

삽질 1회 = 빵 1그램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리뷰

굶주림에 대하여

더는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부터 나는 글자 그대로 삶 자체를 먹는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이후로 육십 년 동안, 나는 굶주림에 대항해 먹는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빅터 프랭클도 수용소의 배고픔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감시가 느슨할 때면, 언제나 먹지 못할 음식 이야기를 했다고. <숨그네>의 수용소 사람들은 언제나 굶주려있다. 인간의 생존이 정당하다면, 빵은 그것이 필요한 자들에게 자연법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굶주림 앞에서 다른 방식으로 쓸모가 있다. 책은 담배 마는 종이가 되어 50장에 소금 1되를 받는다. 책은 정말로 실질적인 유용성을 가졌다.


지금의 나는 어릴 적의 나보다 덜 굶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학교 급식비를 못 내서 굶는 일은 없다. 집에 있는 책들을 중고로 팔아서 쌀을 사야 할 정도로 힘든 생을 이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항상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고, 이를 채워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숨그네>의 문장 한 줄마다 빵 1g을 먹었다. 배고픔을 갈구하는 것은 삶을 갈구하는 것이다. 빵은 생이다.




평범함에 대하여

집에서는 일상용품들의 아름다움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수용소에서 그런 건 잊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손수건의 아름다움이 나를 엄습했다. 그 아름다움은 나를 슬프게 했다.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들은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전시회에서 산 1000원짜리 그림엽서 한 장도 위안의 말을 던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일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면 우리의 감수성을 일상으로 옮기고, 그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사실은 우리를 취약하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다운 동시에 추하게 만든다. 그리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은 아름다움 속으로 편입된다.




고독에 대하여

그 무엇도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나는 내 안에 갇혀 있었고 나에게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그것들에 속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떠나야 하는 자들을 보내고 남은 자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그들의 장례를 치렀다. 세상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달라져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나는 돌아왔고,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다.




그럼에도 산다는 것

그러나 보물은 있다. 내 귀향은 감사함이 끊이지 않는 절름거리는 행복이며, 사소한 일에도 뱅글뱅글 돌아가는 살아남음의 팽이다.

시련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민은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 삶은 매 순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에 즉시 답변해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삶 자체는 우리를 그것에 긍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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