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여름휴가를 이용해 나의 오랜 친구와 설악산 공룡능선을 오르기로 했다. 이른 새벽에 차 시동을 걸고 USB에 담긴 '딥 퍼플' 폴드를 눌렀다. '하이웨이 스타'에서 터져 나오는 드럼소리를 앞세우고 어둠을 힘차게 밀어내며 달려 여명이 틀 무렵 소공원에 도착했다. 하늘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어둠이 걷히면서 설악산의 기운이 천천히 몸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공원 지킴이 곰(동상)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비선대를 향해 야심 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선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무렵 비선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안녕? 오랜만이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천불동 계곡에 병풍처럼 자리한 암벽과 바위들 사이에 자리 잡은 짙은 초록이 우릴 반겼고, 설악의 바람이 잔잔히 다가와 산객의 땀을 말려주었다. 우리가 오를 공룡능선 쪽을 바라보니 암벽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우릴 보고 웃고 있었다. 절경에 머리에 이고 한발 한발 내디디니 심장도 따라 뛰었고, 가슴이 온몸으로 에너지를 계속 퍼다 날랐다.
(공룡능선)
금강굴에 도착, 굴 안쪽 바위에 걸터앉아 밖을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듯했다. ‘여기서 한 달만 머물렀으면...’ 상념에 잠기자 바람 한주먹이 볼을 살짝 때리며 정신 차리라고 했다. 멀리 1275봉이 손을 번쩍 들고 ‘빨리 와라’ 소리치는 것 같았다. 땀을 식힐 겸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과감하게 상의 지퍼를 내리고 포즈를 잡았다. 야성미를 과시하고픈 나의 속마음을 지나가는 바람은 눈치챘을까.
(금강굴 안에서)
“금강산도 식후경! ". 친구의 외치는 소리에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등산로 옆으로 살짝 빠져서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자 친구가 주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어묵탕을 만들고 가져온 주먹밥과 몇 가지 반찬을 펼쳐놓으니 임금님 수라상이 따로 없었다. "밥 먹었으니 커피도 한잔 해야지". 초록 내음이 듬뿍 담긴 커피 향기 속에서 오래전 지나갔던 시간들이 아른거렸다.
(1275봉을 배경으로)
중학교 3학년 때, 윤동주의 ‘서시’를 가슴에 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럼 없이' 살겠노라 다짐했고, 고2 때는 ‘데미안’을 읽고 싱클레어에게 빙의되어 1년을 방황했었지. 걸어가야 할 ‘나의 길‘에 고뇌하고 방황했던 사춘기 시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며 나를 성숙하게 만든 시간들이 더듬어졌다. 고개를 드니 마침 고사목 위로 떠 오른 하현달이 나를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고사목에 걸린 하현달)
공룡의 몸에 밀착하여 올랐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니 1275봉이 턱 밑으로 다가왔고 멀리 울산바위와 세존봉이 눈에 들어왔다. 지구 위 한 점에서 바로 옆 한 점까지 가는데 수만 보의 걸음을 걸었다. 신선봉에 도착한 두 중년은, 연식이 좀 오래되었어도 마음과 몸은 아직 청춘이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지나온 능선들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망막에 펼쳐져있는 절경들을 고이 접어 가슴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중청과 대청에서 뿜어 나오는 기개를 크게 들이마시고 잡념과 고뇌를 뱉어냈다.
(세존봉과 울산바위)
내려오는 길, 원점회귀 막바지인 천당폭포에 다다르자 옷을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으나 국립공원이라 마음을 달랬다. 비선대 삼거리를 지나면서 23km 산행도 모자란 듯 아쉬움에 몇 번을 뒤돌아 봤다. "잘 있어라. 내년에 또 올게" 숙소에 도착, 샤워를 마치고 안주가 맛있다는 술집으로 하산주를 마시러 갔다. “자, 우리들의 청춘을 위하여!” 부딪히는 술잔에 벅찬 감정이 밀려오며 주말 산행 22년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 22년 산행도 거뜬히 오르게 해달라고 두 다리에게 부탁하면서 (그들과 함께) 원샷! 살아있는 동안 건. 즐. 맛 인생이 펼쳐지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