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텅 빈 상자 하나를 가져다 놓는다. 그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억지로 구겨 넣고 뚜껑을 닫는다. 참 묘하고도 서글픈 일이다. 본래 비어 있다는 건 경계가 없어야 하는 것인데, 선을 긋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순수한 공허는 하나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박제된 침묵처럼.
세상은 자꾸만 무(無)를 증명하라고 다그친다. 비어 있으면 비어 있는 대로 두면 좋을 것을, 굳이 괄호를 열고 그 안에 '없음'이라는 이름표를 던져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그 딱딱한 기호 속에 갇힌 허공이 가여워 마음이 쓰였다. 고요하던 빈자리가 차가운 논리의 문법 아래 꾸역꾸역 형체를 갖춰가는 과정이 못내 속상했던 것이다.
어쩌면 내 마음도 그런 식으로 정의되어 왔는지 모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슬픔이나 실체 없는 불안들. 그저 흘러가게 두면 그뿐인 것들을 굳이 '어떠한 상태'라는 틀에 가두고 관리하려 애썼던 날들. 그렇게 괄호를 닫고 나면 마음은 정돈된 듯 보이지만, 정작 그 안의 진실한 공허는 숨이 막혀 시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없는 이 상자가, 결국 모든 숫자의 시작이었다는 역설. 비어 있는 상자를 다시 상자에 넣고, 그 겹겹의 비어 있음이 쌓여 비로소 '하나'가 되고 '둘'이 되는 고독한 문장들.
결국 내가 꾸역꾸역 밀어 넣은 것은 절망이 아니라, 무언가 시작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리였을까. 텅 빈 채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원형.
오늘 나의 속상함은, 그 막막한 시작의 무게를 미리 알아차린 몸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그 상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