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존재가 무를 명명하고 무가 존재를 소환하는 그 찰나의 틈새에서, 정작 뜨거웠던 실체는 소리 없이 증발한다.
태초에 그들은 형이상학적인 계급장을 떼고 진흙탕 속에서 서로의 멱살을 잡았다. 존재는 무의 흉부를 짓누르며 자신의 확실성을 증명하려 했고, 무는 존재의 발목을 낚아채 허공의 심연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주먹이 오가고 골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정작 바닥에 쏟아지는 것은 붉은 피가 아니라 차가운 활자들의 파편뿐이었다.
서로를 지우려다 제 살점마저 헐거워진 두 거물은 결국 텅 빈 들판에 나란히 앉아 담배 한 대를 나눠 피우며 휴전을 선언했다. 죽여도 죽지 않고 살려도 살 수 없는 교착 상태. 그 지독한 피로감 끝에 그들은 기막힌 타협안 하나를 도출해 냈으니, 그것이 바로 ‘언어’라는 이름의 가두리 양식장이었다.
“내가 ‘사과’라고 부를 때 너는 그 속에서 숨죽이고 있어라. 대신 네가 ‘영원’이라 속삭일 때 나는 기꺼이 그 문장에 구멍을 내어주마.”
그렇게 존재의 명분과 무의 핑계가 정교하게 버무려진 사전(辭典)이라는 합의서가 발효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발밑이 낭떠러지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 단단한 활자의 지면 위를 안심하며 걷는다. 실체 없는 관념들이 악단도 없는 무대 위에서 기괴한 춤을 추고, 인간들은 그 춤사위를 진리라 믿으며 스스로 문장 속에 박제되기를 자처한다.
그러나 이 철저한 조작극의 맨 뒷면, 빛에 비춰야만 겨우 읽히는 독소 조항 하나가 서늘하게 박혀 있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사실은, 오직 혀를 자르고 침묵을 선택한 자들만이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로 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비밀을 아는 자들의 눈동자는 깊은 연못처럼 고요할 뿐이다.
[ 서 명 란 ]
존재 : ( )
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