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評: 논리학

《 논리학 》에 대한 해석.

by 김준완

[ 세상을 손가락을 사용해서 목 조르는 방법을 터득한 레슬링 선수의 거만함이 싫어져서 ]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불완전해서 정의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면 그 말 자체가 늘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정의를 내리는 방식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그 글은 거르는 편이다

세상을 목 조르는 방법을 아는 레슬링 선수가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거만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 선운사의 동백을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만 말을 할 수 있는 게임을 시각 한다 ]


진리와 논리의 관계에서 논리는 진리를 완전히 포함하지 못한다

달리 표현하면 진리는 논리보다 큰 영역이다.

논리는 진리를 생산하지 못하며 거짓을 걸러 낼뿐이다

반대로 진리는 늘 논리적이다

선운사 동백을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만 말을 할 수 있는 게임은 논리가 모순돼 있다.

앞의 명제는 가능성의 세계여서 누구든 논리적으로 선운사는 갈 수 있다

되려 논리가 아니라 사실 차원이라면 그는 어떤 이유로 갈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논리적 영역이 아니라 진리의 영역에 가까운 이 명제를 사용한 것은 시작부터 논리학은 모순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 설령 이 규칙을 준수하는 자라 하더라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달팽이 한 마리에게 자유를 말하는 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예수를 찾아야 해서 이 놀이에서 제외한다 ]


자유는 실존주의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핵심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유를 말하는 자는 종교영역이지 논리학에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A는 A다라는 주장을 하는 甲은 하루에 에스프레소 세 잔씩을 꼭 마신다.

지금은 쓴 맛에 길들여져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애완동물인 공룡에게만 커피를 권하는 자신을 사과향만 마음껏 먹고 마셨다 ]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핵심 세 가지는

동일률 : A는 A이다

모순율: A는 A가 아니다

배중률:A이면서 A가 아니다 이다

이 셋은 몇 가지 논리적으로 논해야 할 것이 있지만 이 시와 관련 범위에서만 논하겠다

나는 이 세 부분이 모두 어떻게 모순돼 있는지 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중 위의 문장은 동일률에 관한 것이다

동일률은 A는 A이다라는 틀림없는 명제인데 무엇이 잘못됐다는 것인가

오래전에 프랑스 바칼로레아 논술 시험에서는 <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인가 〉라는 문제를 출제한 적이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외모, 성격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은 게 없는데 어떻게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일 수 있냐는 의미로

출제되었고 그런 의미로 답을 쓴 게 모범 답안중 하나로 채택 되었다

이 시의 윗 시구도 지금은 에스프레소 세잔을 마시지만 과거 에는 사과향을 좋아한 甲 이 동일한 甲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이다.


[ A다라는 주장과 A가 아니라는 주장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乙은 여자와 잠을 스무세 살에 처음으로 잤다

하지만 지금은 버스를 타지 않는다. 두려움 없이는 대담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다 ]


위의 문장은 배중률에 관한 것이다

중간은 없다는 것이다.

A이면서 A가 아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자와 잠을 스물세 살에 처음으로 잔 것과 버스를 타지 않는 乙은 동일인물이다

그런데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문학적으로 비틀었다

맞지 않는 논리를 한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다음 문장의 두려움 없이 대담해질 수 없다는 말은 두려움과 대담함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대개 동일성의 차이의 체계라고 한다. 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배중률도 문제가 있다


[ A는 A가 아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丙은 피곤한 날에는 잊지 않고 기도를 하고는 고양이의 눈을 스톱워치에

맞춰놓고 오 분동안 들여다본다. 오분이 지나면 언제나 잠들지 않는 설산 같은 고양이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런 날이면

며칠 동안 자지 않고 설산을 기어오른다 ]


이번에는 모순율이다

A는 A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 됐다는 것이다

위에 문장에서 丙이 고양이의 눈을 보다가 영혼이 하나 되는 느낌을 설산으로 표현했다

丙이 고양이가 된 것이다

丙은 丙이 아니고 고양이가 된 것이다.


[ 죽음과 언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분명 울고 있는 당신은 선택할 거다

모르는 것은 늘 신비롭고 그 신비가 사랑이니까 ]


죽음이든 언어든 논리의 세계로는 해명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논리학이 아닌 삶의 세계에 있는 울고 있는 당신을 선택하겠다는 선언이다

모르는 것이 삶이고 삶은 그래서 신비로운 것이다라는 삶에 대한 해명이다

삶은 알 수 없는 어떤 지평 안에서 신비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게 사랑이길 소망하는 체념적 긍정의 표현이다


너무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