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시선은 발끝의 잔디에 머물러 있었고, 손에는 불 꺼진 담배가 들려 있었다.
“저기요…”
말이 한번 끊겼다.
“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잠깐 웃으려다 말았다.
“대학 와서… 담배부터 배웠어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서 몇 번 굴렸다.
“여대… 생각보다 숨 막혀요.
남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잘 모르겠어요.
가끔은 내가 좀 이상해지는 것 같고…”
바람이 불었다. 잔디가 낮게 흔들렸다.
“그래서 여기로 왔어요.
이번에… 그냥, 단번에 붙어버리려고요.”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근데…”
잠깐 멈췄다.
“공부가 잘 안 돼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독서실에서… 당신 뒤에 앉으면
계속 신경 쓰여요.
글자가 잘 안 들어오고…”
그녀는 잠깐 나를 올려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떨궜다.
“이상하죠?”
가볍게 웃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자꾸 생각나요.”
말이 조금 빨라졌다.
“그래서… 그냥 말하려고 나왔어요.
오늘 말 안 하면… 계속 이럴 것 같아서.”
잠깐 멈췄다.
“혹시… 괜찮으면…”
말을 고르다가,
“저랑… 만나보실래요?”
곧바로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사귀자는 거긴 한데…”
작게 웃었다.
“부담은 안 드릴게요.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요.”
아주 작게.
“좋아해서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잔디 위로 물 냄새가 올라왔다.
그녀의 숨이 고르게 정리되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듣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자주 대화를 했다.
대단한 사건은 없었다.
대신 오래 남는 장면들만 조금씩 쌓였다.
고3 이후로
나는 가능한 한 생각을 줄이려고 했다.
계획표를 만들고,
그 안에 하루를 집어넣는 식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앉고,
정해진 페이지를 넘기고,
모르는 문장은 표시만 해두고 지나갔다.
고시 공부를 시작하면서는
그 방식이 더 단단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들어온 이후로
그 순서가 자주 틀어졌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그날 그녀의 말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아주 나중에,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나는 그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건 정면으로 걸어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비스듬히,
조금 돌아서,
어딘가를 계속 비껴가는 식의 것이었다.
그때 적어둔 글이 있다.
〈 사선(斜線)으로 지어지는 집 〉
그는 오직 가로로만 흐르는 완고한 강물이다
세상의 모든 직진을 의심하며
갈비뼈 밑, 단단한 수납장에
검은 사랑을 유기한 채 옆으로 걷는다
그의 발바닥이 파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지워지지 않는, 비스듬한 흉터가 남는다
그가 결코 마주한 적 없는 정면의 세계는
늘 옆구리 너머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양눈을 맞춰오는 빛을 피해
고개를 비틀어 꺾을 때만 보이는 것들
그늘진 옆면의 진실들이
조용히 그의 손바닥에 고인다
그 시선이 가닿은 흰 블라우스
가슴팍엔 단추로 잠근 외로운 섬
빳빳하게 풀 먹인 고립의 영토 위로
옷감 사이를 파고드는 파도 소리가 스민다
남자는 그 섬의 주위를 영원히 맴돈다
가장 먼 길을 돌아야만 닿을 수 있는 해안
닿으려 할수록 껍데기는 숨 가쁘게 조여들고
섬은 안갯속으로 자꾸만 가라앉는다
시선이 블라우스의 위도에 걸려 멈출 때
적막을 찢으며 갈비뼈가 ‘쩍’ 하고 갈라졌다
남자는 무너진 파편들을 버리지 못한 채
해안선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쏟아붓는다
여자는 단추를 풀지 않은 채
그의 빗금 속으로 자신의 섬을 밀어 넣는다
두 개의 고립은 서로를 파먹으며 결합한다
옆으로만 걷던 발밑에 비로소 땅이 생기고
섬이었던 여자는 이제 남자의 흉곽을 대신해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간다
.
.
.
그때는 몰랐다.
그게 사랑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것이었는지.
그날 이후로
나는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다시 읽게 되었다.
줄은 눈에 들어왔지만
의미는 조금씩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에 적어둔 문장들은
어딘가 지나치게 단단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생각보다 더 쉽게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