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드 세상 10화
사랑은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마음으로 사랑을 시작하려 드는 건, 시작도 하기 전에 주머니 속 계산기를 꺼내 두드리는 것과 같다. 소수점 아래까지 맞춘 감정은, 대개 지독한 나르시시즘의 변종일 뿐이다. 나는 늘 사랑이 버거웠다. 달빛 아래에서 아주 천천히, 분자 단위로 스며드는 종류의 것.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마음 한구석이 눅눅하게 절여져 있는 그런 방식이다.
고3 시절, 짝사랑 때문에 체중이 7kg이나 빠졌다.
그건 내게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부모님이 켜켜이 쌓아 올린 견고한 사랑의 방식을 학습하며 자란 내게, 타인과의 결합은 시스템의 과부하를 의미했다. 벅참. 그 단어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확인하곤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뒤늦게 발을 디딘 캠퍼스는 낯선 행성 같았다.
강의실 복도를 부유하는 웃음소리, 하루에도 몇번씩 마시던 커피 향에 간신히 적응해 갈 무렵, 나는 경기도 어느 골프장 옆 기숙학원으로 기어 들어갔다. 별장처럼 화려했지만, 실상은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를 보았다.
여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살풍경한 고시생들 사이에서 마치 다른 계절에서 길을 잃고 찾아온 손님 같았다. 남자들은 그녀 주변에서 늘 웅성거렸다. 훗날 대통령의 탄핵 변호인이 된 장수생 형님조차, 그녀에게 수차례 구애했다가 보기 좋게 차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첫사랑에 데일 대로 데인 내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먼 나라의 경제 지표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한 학기 내내 맥주를 들이켜며 캠퍼스 생활을 흉내 냈고, 두 번 정도 프러포즈를 받거나 짧은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사랑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난해한 외국어였다. 이십대 중반을 넘겼음에도, 나는 동정(童貞)조차 떼지 못한 쑥맥이었다.
섹스나 연애보다 내게 시급한 건,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적 고립이었다.
독서실 책상에 “공부는 꿈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문구를 붙여놓고, 나는 스스로를 폐쇄회로 속에 가두었다.
어느 날, 내 독서실 책상 구석에 짧은 낙서 같은 편지가 놓여 있었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는 무기질적인 종이 조각. 나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감정의 여유는 이미 고갈된 상태였으니까.
밤 8시에서 9시사이, 기숙학원의 자율 산책 시간.
나는 200석 규모 도서관에서 빠져나와, 학원 동기 한 명과 골프장 그린 위로 쏟아지는 밤공기를 마시며 걸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페어웨이 한쪽, 그녀가 서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기로 예약된 사람처럼.
그녀는 친구와 함께 걷고 있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세계의 조판이 일순간 멈추고, 잉크 냄새 대신 서늘한 밤의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녀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섰다.
논리적인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기묘하고도 비정한 대면이었다.